[대전기록프로젝트] 대전의 ‘강남’ 선화동 화려한 과거 속 얘기들

[대전기록프로젝트] 대전의 ‘강남’ 선화동 화려한 과거 속 얘기들

  • 승인 2020-04-19 13:10
  • 수정 2020-05-13 09:24
  • 신문게재 2020-04-20 5면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늙은 별의 최후는 소멸, 낡은 집의 말로는 철거다. 소멸한 별의 기억은 수 만 년을 달려와서라도 끝내 우리 곁에 도달하지만, 먼지 속에서 폭삭 주저앉아 버린 집의 기억은 되새겨 볼 방도가 없다.

골리앗의 펀치 닿자 툭툭 30년 전 우리 집이… 툭툭 50년 전 뛰어놀았던 골목이… 툭툭 한 시대가 사라진다. 대전은 조금 빠른 속도로 무너져 가는 중이다. 기억될 기록은 없다. 정훈 시인의 고택이 그러했고, 소제동 철도관사촌이 그럴지도 모른다.



재개발과 도시재생은 결코 부정사가 아니다. 침체 된 도시를 일으키는 시의적절한 선택에 오히려 가깝다. 다만 기억과 보존을 재개발과 도시재생에 대입해본다면 같은 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재개발이라는 딱딱한 명사에 감성과 온기를 불어넣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자발적 소멸이라는 최후를 맞이했을 때, 가슴 벅찬 반짝임으로 남고자 하는 일말의 욕심이다.

중도일보는 2020년 연중 기획 시리즈 '대전기록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재개발과 도시재생으로 사라질 위기에 직면한 동네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버리고 남길 것을 선별해 기록물과 물리적 유산이 보존될 '메모리존(가칭)'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전은 히스토리가 없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할 스토리텔링의 단서도 없다. 대전시 승격 100년을 앞둔 지금 '기록'을 위한 여정은 시작돼야 한다. 이는 훗날 오롯이 대전에 남겨질 문화유산이자, 수년이 지나도 밑천이 드러나지 않을 히스토리의 출발점이 되리라 믿는다. <편집자 주>



1. 도시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
2. 무너지는 도시, 대전이 사라진다
3. 다가오는 재개발, 그들의 이야기
4. 도시재생의 끝은 '메모리존'
5. 정체성 없는 대전, 100년을 준비하자

 

KakaoTalk_20200219_215123296_11
이주를 완료한 집은 선화B구역 이주관리센터에서 출입통제를 해 놓고 있다.
대전 중구 선화동은 부촌이라 불렸다. 주변 학군까지 좋아 흔히 있는 집이 많았다. 선화동에서는 ‘아는 체 말고’, 대흥동에는 ‘있는 체 말라’던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옛 도시의 명성을 품은 레트로(복고풍) 감성의 대표 동네가 됐지만, 선화동의 시대는 재개발 앞에서 곧 허물어지고 말 운명이다.

선화동에는 대개 30~40년을 정착해온 주민들이 많다. 옛 선화동을 기억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이대로 사라지기엔 아쉬운 동네라는 마음만큼은 모두가 같다.

중앙초등학교 앞에서 만난 강상복 할아버지는 30~40년 전의 선화동을 떠올리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나도 중앙국민학교 나왔는데, 저기 넘어 호수돈도 있지. 충남여자학교(충남여자중·고등학교)도 있고, 저기 넘어가면 대성고도 있어. 저 앞쪽 중앙고도 많이 다녔고, 대전고도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지. 이 동네에서 애들 가르치려고 외지에서 이사를 엄청 왔어."

KakaoTalk_20200219_215123296_30
선화동의 상징이기도 한 오성장 목욕탕.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 오성장의 이름을 딴 오성장사거리에서 만난 한규식 할아버지는 대전의 최초 위장전입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한다.

"여기가 학군이 좋았잖아. 그러니까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주소를 여기에 있는 원룸이나 작은 주택에 놓고 애들 학교를 보냈지. 그 뭐여, 그 (위장전입이요?) 응응 그런 거였어. 그래서 이 일대가 부촌으로 잘 사는 사람도 많았는데, 셋방도 많고 그렇게 된 거야.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지."

선화 B구역 재개발사업 조합장인 박태욱 할아버지는 학창시절을 떠올리면서 아쉽고 서글프고 했다.

"우리집은 4대가 이 동네가 고향이야. 아버지부터 손주까지 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내가 선화국민학교 19회 졸업생인데, 애착이 당연히 크지, 말해 뭐혀", "5~60년대는 호수돈 그 앞에 건너 거기가 다 공동묘지였어. 어렸을 땐 호수돈부터 구 법원 사거리까지 대나무 썰매를 탔지. 그땐 그런 낭만이 있었어."

KakaoTalk_20200219_215123296_18
중앙초 앞 담장 위에 지어진 고급주택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많이 낡아보인다.
선화동은 대전시청과 충남도청과 법원과 검찰청, 충남경찰청 등 주요 공공기관과 방송국까지 있던 중심지였다.

중구 국민체육센터 앞에서 만난 최 씨 할아버지는 과거 고급 식당이 즐비했던 동네를 떠올렸다.

"여기 저쪽 집이 원래 택시회사 사장이 살았는데 돈 많은 사람이 여기 많았어. 법원장도 관사에 살았는데, 안에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옛날엔 경비도 삼엄하고 그랬어. 고급 식당과 한복 입고 나오는 요정 술집도 많았지."

최 씨 할아버지는 "재력이 있는 사람이 많이 살고, 법원장이랑 검찰청 직원들이 살아서 치안은 좋았어요. 당시 간등제를 하면서 에너지 아낀다고 가로등을 반만 켰는데, 법원장 집 근처랑 검찰청 관사 주변 가로등만 다 켜두는 거 있지. 그거 하나 평생 서운하더라고"고 회상했다.

대흥동과 함께 대전의 중심지였던 선화동은 1990년 무렵 둔산지구 개발과 함께 쇠퇴기로 접어든다. 공공기관이 둔산동으로 옮겨가고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떠나면서 동네는 본격 슬럼화가 시작됐다.

KakaoTalk_20200219_215123296_03
선화동에서 30년이나 청양슈퍼를 운영해온 김만순 할머니는 "쓸쓸하지. 큰 아파트가 생기고 젊은 사람들 오면 좋지만, 젊은 사람들 많아지면 돈하고 애들 관심 있는 거 말고 다 외면하겠지. 다들 편의점만 가잖아"라고 했다.

선화 B구역 재개발로 인해 이전을 앞둔 선화파출소 앞에서 만난 김창식 할아버지도 예고된 선화동의 변화를 안타까워했다.

"여기 앞 도로가 4차선으로 넓어지거든. 그럼 인사하기도 어려워 지는겨. 지금은 쓱 보고 건너가서 인사하거나 '누구누구 엄마', 옛날 도청 다니던 집은 '도청집', '법원집' 하고 불렀는데, 이제는 뭐 전혀 없지 그런 사람이."
이해미·김성현·이현제 기자
KakaoTalk_20200219_215123296_12
오래된 선화동 고급 주택.
KakaoTalk_20200219_215123296_14
옛날 동네임을 보여주는 폭이 굉장히 좁은 선화동 마을길.
KakaoTalk_20200219_215123296_10
이전 예정인 선화파출소. 선화동이 1~3동으로 나눠져 있을 당시엔 선화지구대였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인천 남동구 장승백이 전통시장 새단장 본격화
  2. 베일 벗은 대전역세권 개발계획…내년 2월 첫삽 확정
  3. 고양시, 2026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참여자 모집
  4. 파주시, 운정신도시 교통혼잡 교차로 신호체계 개선
  5. 대전 횡단보도 건너던 50대 승합차 치여 숨져
  1. 고등학생 70% "고교학점제 선택에 학원·컨설팅 필요"… 미이수학생 낙인 인식도
  2. 대전·충남 우수 법관 13명 공통점은? '경청·존중·공정' 키워드 3개
  3. [홍석환의 3분 경영] 가을 비
  4. 충남도의회, 인재개발원·충남도립대 행정사무감사 "시대 변화 따른 공무원 교육·대학 운영 정상화" 촉구
  5. 대전 환경단체, 열병합발전 발전용량 증설 승인 전기위 규탄

헤드라인 뉴스


대학 경쟁시킨 뒤 차등지원?… ‘서울대 10개 만들기’ 논란

대학 경쟁시킨 뒤 차등지원?… ‘서울대 10개 만들기’ 논란

새 정부의 국정과제인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전국 거점국립대 9곳 모두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재정을 집중 지원한다는 방침이지만, 예상과 달리 평가에 따라 일부 대학에 예산을 몰아주거나 차등 지원한다는 얘기가 나오면서다. 여기에 일반 국립대와 사립대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건의까지 속출하면서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19일 중도일보 취재 결과, 전날인 18일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한 국회 예결위 예산소위는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위한 '국립대학 육성' 사업비 심사를 보류한 것으로..

섬비엔날레 조직위, 기본계획 마련… 성공 개최 시동
섬비엔날레 조직위, 기본계획 마련… 성공 개최 시동

'섬비엔날레' 개막이 500일 앞으로 다가왔다. 섬비엔날레 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는 예술감독과 사무총장, 민간조직위원장 등을 잇따라 선임하며 추진 체계를 재정비하고, 전시 기본계획을 마련하며 성공 개최를 위한 시동을 켰다. 19일 조직위에 따르면, 도와 보령시가 주최하는 제1회 섬비엔날레가 2027년 4월 3일부터 5월 30일까지 2개월 간 열린다. '움직이는 섬 : 사건의 수평선을 넘어'를 주제로 한 이번 비엔날레는 원산도와 고대도 일원에서 펼쳐진다. 2027년 두 개 섬에서의 행사 이후에는 2029년 3개 섬에서, 2031년에..

정부, 공공기관 지자체 발주 공사 지역제한경쟁입찰 대상 확대
정부, 공공기관 지자체 발주 공사 지역제한경쟁입찰 대상 확대

정부가 공공기관과 지자체가 발주하는 공사 '지역제한경쟁입찰' 대상을 확대하는 등 지역 건설업체 살리기에 나선다. 정부는 1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이러한 내용이 담긴 '지방공사 지역 업체 참여 확대방안'을 발표했다. 최근 지역 건설사의 경영난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지방공사는 지역 업체가 최대한 수주할 수 있도록 개선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우선 정부는 공공기관(88억 원 미만)과 지자체(100억 원 미만)의 지역제한경쟁입찰 기준을 150억 원 미만까지 확..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은빛 물결 억새의 향연 은빛 물결 억새의 향연

  • 구직자로 북적이는 KB굿잡 대전 일자리페스티벌 구직자로 북적이는 KB굿잡 대전 일자리페스티벌

  •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찰칵’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찰칵’

  • 추위와 독감 환자 급증에 다시 등장한 마스크 추위와 독감 환자 급증에 다시 등장한 마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