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저마다의 십자가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저마다의 십자가

  • 승인 2020-05-12 10:00
  • 김시내 기자김시내 기자
김시내
1979년 갓 스물이 된 '영호'는 영등포 가리봉동 사탕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곳에서 동료 '순임'을 만나 절절한 첫사랑을 가슴에 꽃 피운다.

1980년 영호는 군대에 입대했다. 비상 계엄령이 선포됐고 어리버리한 신병은 길을 잃은 소녀를 눈감고 보내주려다 오발로 죽이고 만다. 자신의 발도 총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소녀를 부둥켜 안고 오열한다. 첫사랑 순임이 편지와 함께 보내준 박하사탕을 먹지 않고 모아둘 만큼 순수했던 청년이기에 그 죄책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을 터. 참혹한 시대 속 순간의 실수는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계기가 된다.

1984년 제대 후 영호는 형사가 됐다. 선배의 권유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고문을 시작한다. 1987년 운동권 학생에 대한 고문 수사는 절정에 달한다. 본분(?)에 충실했던 나머지 영호는 회식까지 마다하며 일하는 악랄한 고문관이 돼버렸다. 숨어있던 악마 같은 본능이 깨어난 걸까. 세상이 괴물을 만든 걸까. 어리숙하고 사랑에 눈물짓던 그는 더이상 없었다. 시간이 흘러 첫사랑과 재회한 영호. 착해 보이고 다부진 손이 좋았다는 그녀 앞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더듬고는 말한다. "제 손 이제 더러워요." 1999년 어느덧 마흔이다. 영호는 가장이 됐고 IMF까지 겪으며 찌들만큼 찌들어 인생이 괴롭다. 기찻길을 역방향으로 마주하고 선다. 순수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속 한 남자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잔혹한 폭력을 휘둘렀던 가해자. 거시적 관점으로는 당시 군인이고 형사였던 모두가 해당될 수 있다. 하지만 미시적 관점으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군부독재라는 불운했던 시대적 상황의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철저한 소시민이었고 수동적인 인간이었을 뿐이니라. 권력에 굴복시키고 영혼을 무참히 짓밟았던 그때, 선택의 기로 앞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을 것. '그땐 그랬지'하고 웃어 넘길수 없는 수치가 지금도 정신을 괴롭히고 있을지 모른다. 과연 그 보상은 어디에서 받을 수 있는

걸까.

며칠 뒤면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는다. 진압 작전의 최종 책임자인 전두환 씨에 대한 진상 규명도 이제는 마침표를 찍었으면 한다. 죄의식과 트라우마에 휩싸여 삶을 보낸 '영호'들의 양심 고백과 증언도 기대한다. 당시 거리로 나왔던 수많은 학생과 시민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견뎌낸 모두가 진정성 있는 위로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국가 부패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감당해야만 했던 권력 아래의 '을'들 말이다.

과거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역사는 바로 세우고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지난날의 상처는 매듭짓고 두터운 새 갑옷을 입어야 할 때다. 더이상의 아픔은 없어야 한다.

편집2국 김시내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영화·드라마' 촬영 명소로 간다
  2.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①대전 전통산업과 특화거리의 탄생과 번영…그리고 존폐의 기로
  3. 두 자녀 태우고 만취운전 30대 사고까지…여름철 엄격 단속 필요
  4. K리그 휴식기, 대전 서포터즈는 '청소' 중?… "승리의 기운을 줍습니다"
  5. 창업기업 74곳에 최대 4억원 '대전 창업기업 들썩'
  1.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2.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3. 천문연구원, 희귀 왜소신성 발견…공전주기 짧아 중요 연구대상
  4. 대전 보건소 인력부족에 '허덕'…전국 광역시 중 가장 적어 보건의료 '빨간불'
  5. 충남대병원, 교육부 주관 경영평가서 A등급…국립대 중 유일 7년 연속

헤드라인 뉴스


삼전닉스 호남 투자 가시화…충청은 생색내기용 전락

삼전닉스 호남 투자 가시화…충청은 생색내기용 전락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광주·전남에 수백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생산기지 구축에 나설 것이 유력해지면서 충청권은 곁다리 투자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충청권의 경우 두 기업이 막대한 고용창출 등이 기대되는 대규모 생산 라인이 아닌 AI데이터센터 건립으로 기우는 모양새인데 이럴 경우 지역 경제 파급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코스피 시총 투톱으로 글로벌 메모리 업체인 두 기업이 이재명 정부의 강력한 지역균형 발전 정책에 부응하려면 충청권에도 생색내기 용이 아닌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23일 정치권과..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이 2030년 하반기로 지연된다고 대전시가 공식 인정했다. 당초 2028년 개통보다 2년여가 더 늦어지는 것으로, 주요 공정 리스크와 차량 시운전 계획 반영 등을 이유로 꼽았다. 유득원 대전시 행정부시장은 23일 대전시청 기자회견장에서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관련 브리핑을 갖고 "향후 통합공정 계획 수립을 통해 개통 일정 등을 최종 확정할 것"이라면서 개통 지연을 공식화 했다.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은 총연장 38.8㎞, 정거장 45곳, 차량기지 1곳 규모로, 2024년 12월 착공해 현재 본선 14개 전..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중구 중촌동 맞춤패션거리와 정동 인쇄거리, 원동 한복거리 등 과거 대전을 상징하던 유서 깊은 산업 자산들이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자구책 마련을 위해 붙여진 특화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급격한 산업 구조 변화와 유통 시스템 현대화 속에서 경쟁력을 잃어간 채 존폐의 기로에 서면서다. '생산의 효율화'란 거대한 산업 발전 흐름이 오늘날 현대 사회의 모든 가치를 장악하고 있지만, 지역의 고유한 숨결과 정체성이 담긴 전통산업의 흔적이 미래세대에 적절히 계승돼야 마땅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낡은 산업의 미래를 새..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