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인칼럼] 정부출연연구소 민간 기부금을 받자

  • 오피니언
  • 전문인칼럼

[전문인칼럼] 정부출연연구소 민간 기부금을 받자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 승인 2026-03-15 09:58
  • 수정 2026-04-23 14:11
  • 박병주 기자박병주 기자
정흥채 대전테크노파크 센터장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기술 주권 확보의 중추였던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 과학기술은 정부 주도의 강력한 투자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지만, 국민 세금에 기반한 예산 구조는 엄격한 관료적 절차와 연 단위 회계 원칙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구체적 성과를 중시하는 '추격형 연구'에는 효율적이었지만, 성공 가능성은 낮더라도 파급력이 큰 '선도형 연구'나 장기적 투자가 필요한 기초과학 연구에는 제약으로 작용해 왔다. 연구 현장에서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R&D 패러독스'라 부르며 연구자들이 안정적인 과제에만 몰리는 원인으로 지적한다.

이 같은 경직성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는 것이 민간 기부금이다. 민간 기부금은 정부 예산이 담아내기 어려운 연구의 '사각지대'를 메우는 역할을 한다. 정부 출연금이 특정 사업 중심으로 집행되는 반면, 기부금은 연구자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시험하는 초기 탐색 연구나 은퇴 이후에도 연구를 지속하려는 석학 지원 등 더욱 유연하게 활용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출연연 최초로 공익 목적의 'KIST 미래재단'을 설립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인 사례다. 2022년 출범한 이 재단은 임직원들이 연봉의 1%를 기부해 조성한 기금을 바탕으로 시작됐다. 이는 연구자들이 연구비의 수혜자를 넘어 과학기술 발전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재원을 마련하는 '기부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재 재단은 석학 지원, 장학사업, 사회공헌, 창업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가 연구기관의 재정적 완충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과학기술 선진국들은 이미 이러한 방식의 연구 지원 구조를 운영해 왔다. 미국의 국립보건원 재단(FNIH)은 1996년 설립 이후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과 글로벌 제약사들로부터 대규모 기부금을 유치해 공공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위기 당시 민관 협력을 통해 백신 개발을 가속한 'ACTIV' 프로젝트는 민간 재원의 유연성과 신속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독일의 막스플랑크재단 또한 막대한 연구 예산과 함께 민간 기부를 활용해 약 7억 유로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며, 기부자가 특정 연구 분야를 지정할 수 있는 '테마 펀드'를 통해 연구자들에게 유연한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 유입된 기부금은 단순한 연구비 보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민간 기부금은 기부자의 철학에 따라 '실패할 권리'를 허용하는 '인내하는 자본'으로 기능하며, 기존 예산 체계에서 소외되었던 창의적 아이디어의 보호막이 된다. 은퇴 석학들이 연구에 전념하거나 후학을 양성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국가적으로 축적된 지적 자산이 사장되지 않도록 돕는다. 연구 성과가 논문에 머물지 않고 산업화로 이어지도록 '죽음의 계곡'을 넘기 위한 초기 투자를 제공하며, 이는 신산업 창출의 핵심 동력이 된다.

KIST 미래재단의 사례가 전국 출연연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경직된 법적·제도적 환경 개선이 시급하다. 첫째, 세제 혜택의 형평성 제고이다. 현재 대학 기부에 비해 출연연 재단 기부에 대한 세제 혜택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법인세법 등을 개정하여 출연연 기부금도 대학과 동일한 수준의 '특례 기부금'으로 상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규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운영 자율성 확대이다. 기부금을 활용한 인건비 집행이나 연구원 고용 시, 정부의 총액 인건비 규제나 정원 제한에서 예외로 인정해 주는 유연한 인사 지침이 필요하다. 셋째, 투명한 공시와 성과 공유이다. 기부금 사용 내용과 그로 인한 연구 성과를 상세히 공개하여 기부자가 자부심을 느끼고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기부금 재단 설립은 단순한 예산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과학기술 생태계가 관료적 경직성을 탈피하고 연구자의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혁신 가속기'를 장착하는 일이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다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종잣돈으로 돌려주는 기부 문화가 정착될 때, 대한민국의 R&D는 비로소 추격형을 넘어 선도형으로 진화할 수 있다. KIST 미래재단이라는 작은 씨앗이 대한민국 모든 출연연에 뿌리내려 과학기술이 사회를 따뜻하게 밝히고 국가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는 거대한 숲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과학기술 기부는 대한민국이 기술 주권 시대를 당당히 헤쳐 나가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자본이 될 것이다.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중수청 수사인력 충원 윤곽나오나… 대전중수청 직급별 인원은 아직
  2. 대전 공공기관에 정보공개 청구해봤더니… 같은 질문에도 제각각 답변
  3. [WHY이슈현장] 기관명은 대전중수청, 첫발은 세종에서…수사 효율 쟁점
  4. 계룡시, 8월 1일 ‘2026 팥빙수 축제’ 개최
  5. 세종 '행정수도법' 통과 힘 받는다… 국회의장까지 '합심'
  1. [WHY이슈현장] 자치경찰제 시행과 엇갈린 개편, 지역 자율성은 축소 우려
  2. [WHY이슈현장] 검찰청 없는 시대…충청권 사법체계 변화는?
  3. 장윤기 사건 후속 전수조사 대전서 1건… 제한된 조사방식 한계
  4. 국민의힘 충남도당위원장에 정용선 단독 등록… 충청권 전열 재정비 '속도'
  5. 대전 중소병원 신축·확장 등 변화 잇달아…31년 전통 연합정형외과 '변화'

헤드라인 뉴스


`세종=행수` 합헌 전환점 맞나…"이 대통령도 합헌 결정 기대"

'세종=행수' 합헌 전환점 맞나…"이 대통령도 합헌 결정 기대"

2004년부터 22년간 제자리걸음인 '행정수도 이전' 위헌 논란, 올해는 끊어낼 수 있을까. 허허벌판 그 자체에서 우여곡절 끝에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성장한 세월은 합헌의 문턱을 가깝게 하고 있다. 43개 중앙행정기관과 15개 국책연구기관 이전이 마무리됐고, 앞으로 7년 이내 대통령 집무실과 국회 세종의사당 시대도 열리기에 충분한 명분도 갖췄다. 정치권과 학계의 인식도 부정과 중립에서 긍정으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다. 위헌 논란 극복의 선결 조건은 하반기 국회에서 행정수도특별법이 제정되는 데 있다. 이후 다시 위헌 시비에 휘말려도, 합..

집중호우 뒤 폭염 덮친 밥상… 충청권 잎채소값 `껑충`
집중호우 뒤 폭염 덮친 밥상… 충청권 잎채소값 '껑충'

7월 중순 집중호우에 이어 폭염까지 겹치면서 잎채소를 중심으로 농산물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특히 이번 집중호우로 전국 농작물 침수 피해가 충청권에 집중된 만큼 지역 산지의 생산 차질이 이어지며 당분간 소비자들의 장바구니 부담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29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전국 평균 소매가격 기준 청상추(100g)는 1567원으로 한 달 전(1083원)보다 약 44.7% 올랐다. 열무(1㎏)는 3195원으로 전월(2323원) 대비 37.5% 상승했고, 오이(10개)는 1만66..

끝없는 추락 대전하나시티즌, 돌아선 팬심에 차가운 8월 맞이
끝없는 추락 대전하나시티즌, 돌아선 팬심에 차가운 8월 맞이

2026 K-리그1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던 대전하나시티즌이 시즌 중반을 넘어선 현재 벼랑 끝에 몰렸다. K리그1 12개 팀 중 유일하게 홈 승리가 없다는 불명예 속에서 9경기 연속 무승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대전의 현주소는 심각하다. 대전은 7월 25일 김천 상무와의 원정 경기에서 2대3으로 석패했다. 5월 2일 치렀던 광주FC와의 원정 경기에서 5대0 대승을 거둔 이후 승전보는 들리지 않았다. 이후 9경기에서 5무 4패에 허덕이며 25일 기준 4승 8무 8패로 9위까지 미끄러졌다. 안방에서의 무기력증은 치명적이다. 대전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더위 조심하세요’ ‘더위 조심하세요’

  • ‘여름 휴가 떠납니다’ ‘여름 휴가 떠납니다’

  • 폭염에 달궈진 도로 식히는 살수차 폭염에 달궈진 도로 식히는 살수차

  •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권리당원 투표 시작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권리당원 투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