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人] 독립운동의 최북단에서… 광복군의 맏언니 오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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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人] 독립운동의 최북단에서… 광복군의 맏언니 오광심

남편 백파 김학규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 광복후 국민들 조국으로 인도하는 역할 맡기도

  • 승인 2016-04-07 07:44
  • 이해미 기자이해미 기자
[대한人] 13. 오광심

조선독립의 꿈을 품고 만주 벌판을 달렸다. 조국이 아닌 타향이었지만 한시도 나라를 위해 고심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교사라는 신분도 버렸다. 내 나라가 독립하지 않고는 가르침도 소용없다. 오직, 광복의 날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든 독립운동가의 꿈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부귀와 영광도 아니요. 자식의 출세도 아닌, 조국의 독립. 나라를 잃은 상실감만큼 국민을 비통케 하는 것도 없었죠. 그러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주저앉아 울지만은 않았습니다. 세계를 돌며 일본의 만행을 알렸고 하나뿐인 목숨을 담보로 총과 칼을 들었습니다.

▲오광심과 남편 백파 김학규. 사진출처=국가보훈처
▲오광심과 남편 백파 김학규. 사진출처=국가보훈처

여기 백년가약을 맺은 한 부부가 있습니다. 첫 만남부터 동일한 목표의식이 있었고 평생의 반려자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로운 투쟁을 함께 했습니다. 부부가 동시에 건국훈장을 받은 사례가 얼마나 될까요? 이 부부는 년도의 차이는 있지만 건국훈장에 추서됐고 독립운동가 부부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함께 현충원에 안장 되었습니다.

대한人 열세번째 주인공은 만주벌판을 달리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오광심입니다. 오광심은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광복군의 큰언니였습니다.

선생님에서 독립투사가 되기까지

오광심은 1910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 남만주로 가족과 이주했고 1929년 민족주의교육을 실천했던 화흥학교를 졸업합니다. 오 선생은 졸업한 학교에서 민족의식 양성을 위한 선생님으로 교편을 잡았습니다. 어린시절부터 투철한 민족의식을 배웠고 후학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하는 중요한 교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오 선생의 후학양성의 길을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주사변은 만주를 식민지화해 주요자원과 군수물자의 공급처로 만들려는 일본의 불공정한 침략이었습니다.
이에 오 선생은 교편을 내려놓고 조선혁명군(사령관 양세봉) 사령부 군수처에서 일하게 됩니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그녀를 민족투사로 만든 첫 번째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30년 이미 조선혁명군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교사라는 신분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1년이라고 합니다.

조선혁명군은 친일인사를 숙청하고 교민은 보호에 힘썼고 일제기관 파괴와 악덕 부호를 응징하는 목표를 기반으로 설립됐습니다. 항일무장투쟁과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인 조선인들을 처벌하는 계급투쟁의 활동도 병행해왔습니다. 독자적으로 조직을 유지한 최후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으로 평가합니다.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로 10여년을 치열한 전투를 해내며 무장투쟁역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파 김학규, 동지에서 평생의 반려자로

한중연합 항일전에서 지하 연락을 맡았던 오 선생은 이곳에서 백파 김학규를 만나게 됩니다. 김학규는 오 선생처럼 동명중학교 교사였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교직을 그만둔 과거이력이 있었고 두 사람이 결혼하던 당시에는 총사령 양세봉의 참모장으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비슷한 과거와 오직 조선의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지닌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됐던 것이죠.

백파 김학규는 부인인 오광심과 함께 조선 독립운동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38년 조선혁명당의 대표로 한국독립당과 통합을 이끌어 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곽단체로서 임무를 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강화했다는 점입니다. 이후 1941년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취임, 한국인 학병과 지원병을 포섭 훈련 시켜 광복군에 편입시키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 주중미공군사령관과 협의해 한국인 훈련반을 설치하는 등 독립운동의 큰 울타리 역할을 자처했었습니다.

남편 김학규 또한 자신만큼 민주의식이 뚜렷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부부 독립운동가가 됐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당연한 과정이었을 겁니다. 무장투쟁이든, 정신적인 투쟁이든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오광심과 김학규는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만주에서 남경으로 파견됩니다. 이곳에서 김학규 선생은 조선혁명당 본부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남경에서 만주까지, 기밀 문서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죠. 보고서 작성은 남편 김학규, 보고서 전달은 부인 오광심의 몫이었습니다. 오광심은 김학규의 보고서 전문을 모두 외운 뒤 구술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에 당 간부들은 오광심 편으로 비밀 지령문을 작성해 전달하게 되죠. 이 과정에서 오광심은 심각한 화상을 입게 되고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다시 남경으로 이동합니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창설모습. 사진출처=국가보훈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창설모습. 사진출처=국가보훈처

대한 광복군, 그들이 없었더라면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는 중국 곳곳에서 활약하는 독립군을 모두 모아 한국 광복군을 조직합니다.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전시수도인 중경에 모였는데 이곳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일제의 눈을 피해 무력단체 창설을 준비해왔던 곳으로 독립투사들에게는 의미가 있는 장소였죠.

남편 김학규는 물론 오광심 선생은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등 여군 동지들과 함께 했는데 이들은 서안 총사령부에서 광복군 홍보와 선전 활동을 맡게 됩니다. 광복군의 기관지 간행을 준비했고 1941년 『광복』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기 이릅니다. 한국어와 중국어판 두가지로 제작,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우리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

오광심 선생은 국민으로써 여성의 역할을 끊임없이 주장했고 1년 6개월 가량을 광복 간행지 간행에 힘썼습니다. 이후 광복군으로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습니다. 모병업무를 강화하기 위한 산동반도로의 차출.

부부는 목적지인 산동반도가 아닌 안휘성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초모공작을 전개했고 비로소 1944년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징집된 한인 학도병 다수가 일본군을 탈출했고 이들은 일정기간 교육을 거쳐 광복군으로 편입되기에 이릅니다. 일부는 중경 총사령부로 이동했고 일부는 남아 광복군 제3지대 창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초기 8명에서 3년간 160여명으로 늘어난 광복군 제3지대는 광복군 초모활동 절반을 규합했다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죠. 이때 제3지대장은 바로 남편 김학규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군인을 양성하고 적과 무력으로 싸울 조건은 모두 갖추는 것은 기본요소였고 오광심의 독립운동은 정신적인 무장을 중요시 했습니다. 그 옛날 민족의식을 가르치던 선생님처럼 한인들에게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강조했던 것이죠.

그렇게 14년이라는 세월을 독립운동에 오롯이 받쳤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15일 드디어 조국은 광복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멀리 중국의 땅에서 선생을 비롯한 광복군에게 날아든 꿈같은 소식이었죠. 고대하던 순간이었고 매일을 기도하던 조국의 독립.

오광심과 김학규 부부는 12년 만에 만주로 돌아옵니다. 조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됐지만 혼란기를 거쳐야만 했죠. 이때 다시 독립투사 부부가 맹활약합니다. 김학규는 광복군 총사령부 주상해판사처장에 임명됐고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3만여명이 넘는 교포들을 안전하게 고국으로 귀국시켰죠. 교포 1만2천여명은 미군 비행기로 수송시키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부군 곁에는 오광심이 있었죠.

치열한 최북단의 독립투쟁지역에서부터 해방은 됐지만 혼란스러운 광복의 순간까지 이 역사적 순간에 모두 오광심 선생이 존재했습니다. 올바른 민족의식을 통해서 반드시 조국이 독립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의 인생이었습니다.

화흥학교에서 조선혁명군으로 그리고 민족혁명당, 이어 한국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이름은 변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오직 단 하나였음을 오광심의 삶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독립운동가 한분을 또 만났습니다. 한분한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그분들이 우리에게 준 광복이라는 큰 선물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일이겠지요. 1976년 4월7일 오광심 선생이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뒤에야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현실은 외롭고 두렵고 치열했을지 몰라도 그녀의 인생은 우리에게 애국심을 잘 보여주는 교과서처럼 보입니다. 고마운 당신, 오광심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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