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원더풀 미나리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원더풀 미나리

  • 승인 2021-04-14 12:37
  • 신문게재 2021-04-15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GettyImages-a12220925
게티이미지 제공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나무에 싹이 돋아 앞산 뒷산이 녹색으로 물들고 있다. 동면에서 깨어난 뱀도 따스한 햇살에 일광욕 하느라 사람이 지나가도 모른다. 새로 태어난 다람쥐 가족도 선보일 것이다. 봄엔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산과 들엔 나물 천지다. 사실, 고기보다 맛있는 게 봄나물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파릇한 나물의 향기. 저마다의 독특하고 강한 향을 간직한 나물은 그야말로 보약이다. 이름처럼 쓴 씀바귀, 머위, 취나물, 쑥, 두릅, 지칭게, 미나리 등 '만한전석'이 부럽지 않다. 불미나리로도 불리는 돌미나리는 깨끗이 씻어 된장을 끓여 썩썩 비벼먹으면 기가 막히다. 어렸을 땐 미나리 향이 너무 강해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았었다. 지금은 금요장터에서 돌미나리를 만나면 냉큼 산다.

작년 봄, 친구가 시골 고향에서 베어 온 거라며 미나리 한보따리를 나에게 안겼다. 짙은 갈색의 줄기가 대나무만큼 굵고 싱싱했다. "미나리전 해먹어봐." 친구는 이 말만 불쑥 하고 갔다. 미나리는 여태까지 살짝 데쳐 조물조물 무치거나 날것을 밥과 함께 비벼먹은 것밖에 없는데, 미나리전이라고?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반반 섞고 시퍼런 미나리를 싹둑싹둑 잘라 넣어 팬에 기름을 듬뿍 두르고 부쳤다. 기름의 고소함과 미나리의 향긋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마침 같은 아파트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생각나 미나리 한 다발을 갖다 드렸다. 좋은 건 나눠먹어야 제 맛이다. 몇날며칠을 퇴근하면 미나리전을 부쳐먹었다. 비오는 날 막걸리랑 먹어도 찰떡궁합이겠는 걸? 부침개만 해먹다 삼겹살에 먹어도 좋겠다 싶어 휴일 점심에 거하게 한 상 차려먹었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경이로운 맛이었다. 원더풀 미나리!



올 봄은 이 미나리가 특별한 존재가 됐다.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막 자라 누구나 먹을 수 있고 김치에 먹고 찌개에 넣어 먹는' 미나리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영화 '미나리'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또 한번 일을 낼 지 기대된다. '미나리'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리고 강열하다. 가족은 어느 문화에서나 보편성을 띤다. 끈끈하거나 징글징글하거나. 그래서 가족의 정의는 다채롭다.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고 했다. 인간은 왜 이 끔찍한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미나리'의 제이콥 부부처럼 모국을 떠난 이민자에게 가족은,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는 고인이 된 시인 허수경은 이역만리 독일에서 오랫동안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했다. 시인은 어느 해 봄 마당 귀퉁이에 고향에서 먹던 채소를 심었다. 미나리와 깻잎, 고추, 갓. 하지만 우박이 내려 망쳤다. 시인은 마당 귀퉁이에 서서 울었다. 많은 인내가 필요한 바빌론의 고대어를 배우는 것보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일까. 삭아들어가는 볕에 앉아 마늘을 까던 어머니의 아린 숨결. 이방인으로 살아간 시인에게 고향의 맛은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인류는 여기에서 저기로 계속 이동을 한다. 고향을 떠나는 일은 인류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륙도 어떤 한 뼘의 땅도 온전히 주인이 존재할까. 이주의 역사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마당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머슴인가. 재난 앞에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득세하는 지금 이주민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이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아시아계에 대한 범죄가 급증하는 추세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 겨울엔 한 여성 이주노동자가 한파에 난방기가 고장 난 비닐하우스에서 숨지기도 했다. 동남아 가난한 나라 출신의 이주 노동자나 탈북민에 대한 멸시와 차별 말이다. 부유하는 이주자들의 신산한 인생역정. 진창에서도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미나리 같은 사람들. <제2사회부장 겸 교열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안양시, 평촌신도시 정비 ‘청신호’ 가속
  2. 위기 미혼한부모 가정에 3000만 원 후원금 전달
  3. 환자 목부위 침 시술 한의사, 환자 척수손상 금고형 선고
  4. 대전서 교통사고로 올해 54명 사망…전년대비 2배 증가 대책 추진
  5. 자립준비청년 자기계발비 300만원 후원
  1. 천안시, '담헌달빛관' 개관
  2. 유성구장애인종합복지관 '2025년 활동지원사 힐링나들이'
  3. 장애인 보조견 환영합니다
  4. “웃으며 배우는 가족 소통법”
  5. 대전시사회복지협의회-유한킴벌리 대전공장 사랑의 김장 나눔

헤드라인 뉴스


충남도, 민자 4000억 유치 `K-모빌리티 허브` 만든다

충남도, 민자 4000억 유치 'K-모빌리티 허브' 만든다

충남도와 당진시가 국내 기업과 손잡고 당진항 일원에 대한민국 자동차 수출을 이끌어갈 최첨단 복합물류단지를 조성한다. 조성이 성공적으로 완료된다면, 민선8기 도가 중점 추진 중인 '베이밸리 건설'과 '당진항 수출 전진기지 육성' 전략이 한층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김태흠 충남지사는 17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오성환 당진시장, 이정환 SK 렌터카 대표이사 등과 '케이(K)-모빌리티 오토 허브 일반물류단지 조성 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전국 처음으로 자동차산업과 항만물류를 결합시킨 K-모빌리티 오토 허브 일반물류단지는 당진..

대전 청약시장 쏠림현상 뚜렷… 옥석가리기 심화되나
대전 청약시장 쏠림현상 뚜렷… 옥석가리기 심화되나

올해 대전 아파트 청약시장에서는 특정 지역으로 수요가 집중되는 쏠림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입지와 분양가 등 경쟁력을 갖춘 인기 단지가 선별되면서 '옥석 가리기'가 한층 심화되는 분위기다. 17일 한국부동산원 청약홈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분양에 나선 '도룡자이 라피크'가 침체된 분양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GS건설이 공급한 도룡자이 라피크는 1~2순위 청약에서 214세대 모집에 3636건이 접수되며 평균 16.9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특히 84㎡B형은 59.16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이며 대부분 1..

민주당, 내년 지방선거 공천 위해 모든 당원 ‘1인 1표’ 도입
민주당, 내년 지방선거 공천 위해 모든 당원 ‘1인 1표’ 도입

2026년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이 공천을 위해 모든 당원에게 ‘1인 1표’를 부여하는 내용의 당헌·당규 개정에 착수한다. 그동안 대표나 최고위원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을 20:1 미만으로 했던 규정을 개정해 모든 당원에게 투표권을 동등하게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정청래 대표는 1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내년 6·3지방선거에서 열린 공천 시스템으로 공천 혁명을 이룩하겠다"며 "19일과 20일 이틀간 1인 1표 시대 당원 주권 정당에 대한 당원 의사를 묻는 역사적인 전 당원 투표를 실시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계절의 색 뽐내는 도심 계절의 색 뽐내는 도심

  • 교통사망사고 제로 대전 선포식 교통사망사고 제로 대전 선포식

  •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초등 3~4학년부 4강전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초등 3~4학년부 4강전

  •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초등 5~6학년부 예선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초등 5~6학년부 예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