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퇴근 전 45분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퇴근 전 45분

  • 승인 2021-05-26 12:54
  • 신문게재 2021-05-27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GettyImages-a11200752
게티이미지 제공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갑자기 허기진다. 눈은 교열 대장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머릿속은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삼겹살 먹을까? 아삭아삭한 노지 포기상추 맛있던데. 상추에 금방 지은 밥과 육즙 터지는 고기 두점, 양파 서너 쪽 그리고 쌈장을 얹어 크게 한 입. 하아, 라면도 먹고 싶어. 꼬들한 면 건져먹고 얼큰한 국물에 밥 한 공기 투하, 푹 익은 총각김치 얹어먹으면 끝내주지. 손이 떨리고 식은 땀이 나려고 한다. 먹을 게 없으니 물만 들이켠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전두환이 크림빵 두 개를 건넨다면 망설이지 않고 덥석 받아 게걸스럽게 먹을 것만 같다. 슬프게도 인간의 이성은 본능을 이기지 못한다.

어느새 나는 인터넷을 열고 하이에나처럼 먹이를 찾아 헤맨다. 마우스를 쥔 손이 분주해진다. 미슐랭 별 세 개를 달았다는 호텔 한식당 요리가 촤르르 나온다. 재벌이 운영하는 호텔의 한식당이니만큼 최고의 식재료를 썼단다. 숯불 등심구이, 이름도 생소한 삼색어아탕이 비싼 백자, 유기에 담겨 뽐낸다. 안젤리나 졸리가 방문했다는 식당 요리도 보인다. 세계인(셀럽) 입맛에 맞춰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식'이어서인지 모양새가 영락없는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다. 밥은 새 모이 만큼이고 반찬도 젓가락으로 한번 집으면 그만일 듯.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먹으면 딱이겠다. 고급지고 정갈해서 호사스럽게 보일 뿐, 군침을 돌게 하지는 않는다. 다른 요리로 바로 이동.

푸짐하게 끓는 김치찌개를 넋을 놓고 본다. 나의 뇌는 그것을 뜨거운 밥에 떠넣어 비벼 먹는다. 계란 반숙 프라이, 살라미, 치즈, 양상추 등에 토마토 케첩과 머스터드 소스를 듬뿍 뿌린 토스트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뚝딱!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 눈의 동공은 피자 라지 사이즈만큼 커지고 침을 하도 삼켜 목구멍이 헐 지경이다. 퇴근 직전에 겪는 괴로운 현상이다. 종종 생각한다. 전쟁이 나면 먹을 게 없을텐데 배고픔을 어떻게 견딜까. 2차대전 중 인육을 먹었다는 얘기가 있다.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인육은 아니더라도 먹어본 적 없는 동물을 입에 대는 상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정말 애벌레, 뱀, 쥐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일본의 동시통역사이자 작가였던 '먹보 대마왕' 요네하라 마리가 먹어봤다는 뱀고기. 지지난주 계룡산 갑사에서 뱀과 조우한 살 떨리는 경험이 떠오른다. 풀섶에 들어갔다 풀 색깔과 똑같은 뱀을 못 보고 그만 발로 밟아버린 것이다. 물컹한 느낌과 동시에 기다랗고 굵은 뭔가가 발 양쪽에서 허리까지 뛰어오르는 건 한순간이었다. "엄마아!" 나는 용수철 튀어오르듯 길로 뛰어나갔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법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던 스님이 내 비명소리에 놀라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날벼락을 맞은 뱀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돌담을 넘어 정신없이 도망갔다. 나는 그 뱀의 크기에 또 한번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실제로 본 뱀 중에서 가장 길고 굵었다. 밑창이 두툼한 등산화인데도 밟았을 때의 느낌이 생생했다. 그런데 그런 뱀을 먹었다고?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어가고 저혈당 증세로 몸이 휘청이는 상황에서 별의별 생각에 사로잡힌다. 맛난 음식을 먹으면 순한 양이 되는 나 역시 먹보 대마왕이지만 미식가는 아니다. 그저 많이 맛있게 먹을 뿐이다. 『미식 예찬』의 브리야 사바랭도 "'미식'은 언제나 '식탐'이나 '대식'과 혼동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로마시대의 타락한 황제나 귀족들처럼 배터지게 먹고 토하고 또 먹는 행위는 욕망하지 않는다. 안정된 식량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일평생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 밥벌이는 인간의 숙명이다. 오늘 저녁엔 어떤 음식으로 내 노동의 대가를 보상받을까. <제 2사회부장 겸 교열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갑천 야경즐기며 워킹' 대전달빛걷기대회 5월 10일 개막
  2. 수도 서울의 높은 벽...'세종시=행정수도' 골든타임 놓치나
  3. 충남 미래신산업 국가산단 윤곽… "환황해권 수소에너지 메카로"
  4. 이상철 항우연 원장 "한화에어로 지재권 갈등 원만하게 협의"
  5.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1. 충청권 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 세종 비만도 전국서 가장 낮아
  2. 대학 10곳중 7곳 올해 등록금 올려... 평균 710만원·의학계열 1016만원 ↑
  3.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4. [춘하추동]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5. 2025 세종 한우축제 개최...맛과 가격, 영양 모두 잡는다

헤드라인 뉴스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이제는 작업복만 봐도 이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28일 오전 9시께 매일 고된 노동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주는 세탁소. 커다란 세탁기 3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 작업복 100여 벌이 세탁기 안에서 시원하게 묵은 때를 씻어낼 때, 세탁소 근로자 고모(53)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서 4년째 운영 중인 노동자 작업복 전문 세탁소 '덕구클리닝'. 대덕산업단지 공장 근로자 등 생산·기술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 세탁으로는 지우기 힘든 기름, 분진 등으로 때가 탄 작업복을 대상으로 세탁한다...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9연전을 통해 리그 선두권 경쟁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휴식 없는 9연전'을 펼친다. KBO리그는 통상적으로 잔여 경기 편성 기간 전에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지 않지만,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프로야구 5경기가 편성했다. 휴식일로 예정된 건 사흘 후인 8일이다. 9연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기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 승부다. 리그 1위와 3위의 맞대결인 만큼, 순위표 상단이 한순간에 뒤바..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생이 교직원과 시민을 상대로 흉기 난동을 부리고, 교사가 어린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충북교육청에 따르면 28일 오전 8시 33분쯤 청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수교육대상 2학년 A(18) 군이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4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A 군을 포함한 모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이 학생은 특수교육 대상이지만, 학부모 요구로 일반학급에서 공부해 왔다. 가해 학생은 사건 당일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꼭 일하고 싶습니다’

  •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