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뜨거운 것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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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뜨거운 것이 좋아

  • 승인 2022-11-30 08:55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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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제법 차갑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도 만만찮다. 바싹 마른 가랑잎들이 바람에 버석거린다. 바지 속에 레깅스를 입고 올걸 그랬나? 배낭의 허리 끈을 바짝 조여매고 한 발 한 발 올라간다. 금요일이라 사람이 없어 숲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햇살 햇살이 가득 내려앉는다. 쉬지 않고 계속 올라간다. 어느새 내 몸은 탄력이 붙어 발걸음이 가뿐하다. 깊은 숨을 토해낼 때마다 등에서 땀이 배어나온다. 등산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무엇은 그렇지 않겠는가. 산은 정복의 대상이면서 친구 같고 스승 같고 애인 같은 존재다. 편하지만 함부로 대하면 응징이 따른다. 그것이 자연의 속성이다. 반칙을 하면 어김없이 레드 카드를 내미는 축구처럼 말이다.

총성없는 전쟁, 월드컵이 달아오른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월드컵은 시각적인 즐거움도 크다. 초록의 그라운드에서 세렝게티의 사자같은 선수들이 종횡무진 누비는 장면은 숨막힐 듯 아름답다. 전속력으로 달려 얼룩말의 숨통을 단번에 끊는 맹수의 이글거리는 눈빛. 야생의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스포츠. 축구는 거칠고 위험한 운동이다. 그래서 월드컵을 전쟁에 비유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남성은 폭력본능이 있어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 원초적 본능을 스포츠에서만 발산하면 안될까. 그러면 이 세상이 훨씬 평화로울텐데.

전날 밤 한국과 우루과이전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역시 공은 둥글었다. 들어갈 듯 하다 번번이 튕겨나가 심장이 쫄밋거려 가만히 앉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탄식과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그렇지, 그쪽으로.", "아아악, 안돼 안돼. 휴우."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다 보니 옆집이 신경 쓰였다. 어르신은 지금 주무실텐데. 여성 호르몬이 줄어서일까, 부쩍 액션에 끌린다. 특히 여전사가 나오는 영화는 감정이입이 제대로 돼 몰입도가 높다. 몇 년 전엔 권투를 배워볼까 생각도 했었다. 축구가 끝나고 12시 넘어 이불속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골아떨어졌다. 그런데 자다가 피를 보고야 말았다. 왜앵~. 모기가 오른쪽 뺨 주위에서 맴도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내 뺨을 철썩 철썩 때렸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스탠드를 켜고 일어나 가만히 둘러보니 이놈이 스탠드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내 피를 빨아먹었는지 배가 불룩했다. 탁! 잡았다 요놈. 손가락이 피로 물들었다. 쾌재를 부르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산에 오른 지 네시간 만에 내려왔다. 동학사 아래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김밥 한 줄을 샀다. 삼불봉에서 관음봉 가는 능선에서 이것저것 먹었지만 새참도 먹을 겸 쉬었다 가기로 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밖으로 나와 나무 탁자에 놓고 앉았다. 비로소 피곤이 몰려왔다. 요즘 말로 '루틴'이랄까. 전엔 산이나 여행을 가면 한 끼는 컵라면과 김밥을 먹곤 했다. 걷고 또 걷고 사정없이 몸을 불태운 후 편의점에 서서 라면과 김밥을 먹으면서 유리창 너머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가롭게 구경할 때의 희열감. 값비싼 음식, 안락한 잠자리? 매력 없다. 왜냐면 난 고행하는 구도자여야 하니까. 허세 쩐다. 내 여행의 콘셉트라고나 할까.



얼큰하고 뜨끈한 라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몸이 노곤해졌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후루룩 쩝쩝 먹으면서 김밥도 하나 입에 넣었다. 그런데 김밥 맛이 영 아니었다. 물가가 오른 탓일까. 맨밥에 재료 몇 개 넣고 끝이었다. 거기다 제대로 안 썰어서 집어 올리면 김이 맥없이 풀려버려 계란, 채썬 당근, 오이 나부랭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져 버린 꼴이 됐다. 철부지 아줌마의 허세를 이렇게 망쳐놓다니. 그래도 라면은 카타르의 야수들만큼 화끈하고 매웠다.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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