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니 부산 명물이 뭔지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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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니 부산 명물이 뭔지 아나?

  • 승인 2022-12-21 09:12
  • 수정 2022-12-21 09:14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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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올라타자 훈기가 돌았다. 역에 정차할 때마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부산에 왔다는 게 실감났다. 새벽기차를 타고 오느라 일찍 일어난 탓에 졸음이 쏟아졌다. 휴대폰에 얼굴을 박고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옆자리 청년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을 뻔 했다. 머리를 바로 세웠지만 또 꾸벅꾸벅. '이 아지매 와 이라노?' 청년이 그런 눈빛으로 날 째려봤다. 맞은 편에 빈자리가 생기자 청년은 부리나케 자리를 옮겼다. 야, 일마야. 졸린 건 항우 장사도 몬 이긴다!

권태롭고 무료한 일상에 찌들어 살다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부산에 오면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다. 낯선 외국어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패션도 다채롭다. 남의 시선 의식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나도 으쓱으쓱해진다. 해운대의 망망대해와 잿빛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이 아득하다.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펼치자 스르르 쏟아진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가 시간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물가에 꼼짝 않고 앉아 긴 머리를 날리며 하염없이 바다를 응시하는, 끈 달린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청사포까지 해안길을 걷고 광안리에 오자 깜깜했다. 바다에 비친 찬란한 불빛이 황홀했다. 녹초가 된 몸으로 대로변 찜질방에 들어갔다. 뽀얀 김이 서린 목욕탕에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부산 갈매기'를 흥얼거렸다. 샤워기에서 뿜어 나오는 뜨거운 물로 머리를 벅벅 감고 몸에 비누칠을 하고 나자 피로가 싹 풀렸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안경이 없어졌다. 눈을 부릅뜨고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힘이 쭉 빠졌다. 울상이 된 나를 보고 아주머니들도 이리저리 둘러봤으나 허사였다. "안경은 누가 안 가져 갈 낀데. 우짜노." 여행 망쳤구나. 아, 안경 새로 맞추려면 몇 십만 원 깨지겠네, 흑. 포기하고 때를 밀려고 자리에 앉아 대야에 물을 받는데 옆에 안경이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KTX에 몸을 실었다.

목욕탕에서 실컷 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통유리로 보이는 야경이 근사했다. 매점 아주머니와 몇마디 나누고 책을 읽다 곯아 떨어졌다. 그런데 잠결에 누가 이불을 덮어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아침에 일어나 전날 밤 매점 아주머니가 이불을 덮어주고 퇴근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방인에게 베푸는 무한한 호의와 친절. 여행의 맛은 이런 것이다.



내가 부산을 뻔질나게 가는 진짜 이유는 돼지국밥 때문이다.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 돼지국밥은 현지에서 먹어야 제 맛이다. 커다란 가마솥에 돼지뼈를 오랫동안 고아 우려낸 뽀얀 육수에 푹 삶은 고기가 듬뿍 들어간 돼지국밥은 중독성이 있다. 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성. 적당히 비계가 붙은 고기에 부추 겉절이와 양념장, 새우젓으로 간한 칼칼한 국물을 들이켜면 속이 후끈해지며 콧잔등에 땀이 맺힌다. 수육 백반도 빼놓을 수 없다. 한번은 점심에 돼지국밥, 저녁엔 수육백반을 한 식당에서 두 끼를 먹었다. 공깃밥을 추가로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해 소화제를 사먹어야 했다.

돼지국밥은 한국전쟁 당시 1.4 후퇴 때 내려온 피란민들이 해먹었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부산, 밀양이 유명하다. 언제 밀양 돼지국밥도 먹어봐야겠다. 엄동설한 배고픈 실향민의 허기를 면해 준 돼지국밥이야말로 서민의 음식이다. 갑자기 기온이 쑥 내려가면서 혹한이 몰아쳤다. 크리스마스도 다가온다. 어떤 사람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음식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하루를 누릴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냉기 도는 방에서, 길 위에서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거친 세상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국밥 한 그릇으로 온기를 나누는 세상이 되길 소망한다.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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