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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한 대전대 교수 |
그동안 남쪽 정부에서는 그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몇 번의 시도를 한 바 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이제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북쪽 정부에서도 안 의사 유해를 찾기 위한 시도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쪽의 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데 있어서 여러 어려운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주변국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 정부의 내부 사정일 것이다. 주변국이란 북쪽 정부와 일본, 중국이다. 먼저 일본의 문제이다. 안 의사가 순국했을 때, 그의 유해는 당연히 유족에게 갔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가족에게 넘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조국 독립의 결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의 무덤 앞에서 선서하고 만주 벌판으로 떠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 정부 자료실 어디인가에 안 의사가 묻힌 장소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모른다고 일관할 뿐, 전혀 협조하지 않고 있다. 진정한 한일관계란 아마도 여기서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중국과 북쪽 정부의 문제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전혀 외교상의 문제가 일어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남과 북이 합의하면 유해를 찾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 있다고 천명한 까닭이다.
남는 것은 남쪽과 북쪽의 문제이다. 그동안 북쪽은 안 의사의 고향이 황해도 해주임을 내세워 그에 대한 연고권이 북에 있다고 했다. 반면 남쪽은 남쪽대로 안 의사의 유해가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했고, 그 연장선에서 유해 발굴의 주체 또한 남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터이다. 이런 주장들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이루며 아까운 시간만 흘러가 버린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뤼순(旅順) 감옥 뒤편의 공동묘지는 현대화의 흐름을 피하지 못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거의 훼손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가면 아마도 안 의사의 유해는 영원히 찾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1909년 조선의 한 청년은 하얼빈 인근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열차를 기다렸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인물이 이 열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은 이 인물을 제거하는 데서 시작되는 일이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가슴 속에 숨겨진 태극기와 권총을 어루만지며 이 청년은 하얼빈 역 풀랫폼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열차 문이 열리고 조선 침략의 원흉이 보였다.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권총을 꺼내 들었고 방아쇠는 당겨졌다. 그 당긴 힘은 청년의 물리력이 아니라 2000만 조선 민족의 정신과 조국에 대한 사랑에 의해 나온 것이다. 원흉은 그 자리에서 꺼꾸러졌다. 청년은 그가 사라진다고 해서 조국이 곧바로 독립된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니 뤼순 감옥의 차가운 방에서 순국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이 아닌가. "조국이 광복되는 날 자신은 천국에서 춤을 추겠노라고" 말이다.
안 의사에게는 남과 북 모두가 조국이다. 그의 입장에서 연고권은 의미가 없다. 냉정히 보면, 안 의사의 유해는 북으로 가는 것이 맞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고향이 황해도 해주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이것 말고도 더 있다. 남쪽에는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1948년 건국절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친일파 또한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현실을 만들어놓고 무슨 염치로 안 의사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연고권으로 줄다리기 하면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하루라도 빨리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이다. /송기한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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