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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조운선인 마도1호선을 재현한 선박 모습. 쌀과 콩따위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안전하게 오갈 운하를 구상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사진=중도일보DB) |
1. 쌀·콩·청자 그대로 수장
2. 조운선 선원들의 나날
3. 의항·굴포운하 개척의날
태안반도는 서해상에 돌출된 지형 탓에 한양을 오가는 바닷길의 길목이었다. 당시 항해는 육지에 붙어서 해안선을 따라 한양까지 북상하는 것이었는데 태안 안흥량은 억센 조류가 해저 바위나 섬에 부딪혀 소용돌이 치고 조류 변화가 심한 곳이었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마도해역에서 실측한 값을 보면, 평균 수심은 10m 남짓이었으나, 조석차는 조금 때는 3m, 사리 때는 8m로 차이가 크다. 물살이 약한 시기(조금)에는 비교적 탁도가 양호하지만 물살이 빠른(사리)시기에는 해수가 아주 탁해 깊고 얕은 정도를 육안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항해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때 이곳을 지나던 조운선 해난사고가 빈번했다. 안흥량은 황해도의 인당수, 강화도의 손돌목, 전남의 울돌목과 함께 우리나라 4대 험조처로 꼽힌다. 육로로 치면 한양에 이르는 길목에 높은 산이 버티고 있는 셈으로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짙은 안개, 절벽의 낙석 등으로 위험한 곳과 비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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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조운로와 굴포운하 운항로. 굴포운하와 의항운하 그리고 두 개의 창고를 짓고 중간에 우마차로 운송하는 노선이 표시되어 있다. (그래픽=서산문화원 '서산 천수만의 옛 모습' 인용) |
조운선이 해상에서 난파되자 국가의 재정까지 흔들린 1134년(고려 인종 12년) 약 7km 정도의 인공수로를 만들어 조운에 안전을 기하려 굴포(판개)운하의 개착공사가 시작됐다. 굴포(판개) 운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공사였다. 북쪽의 가로림만과 남쪽의 천수만을 수로로 연결하고자 현재의 태안읍 도내리에서 서산시 팔봉면 쪽의 어송리와 진장리 사이를 파서 운하를 놓으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일부 인공수로를 만들었으나 나머지 3㎞는 암반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 후 왜구가 서해에 출몰해 조운선을 약탈해 세곡을 해상으로 올리는 조운이 한때 중단됐다. 1391년(공양왕 3년)에 다시 백성을 징발해 공사를 재개했고, 단단한 화강암이 깔린 데다 조수가 들락거리며 흙을 메우는 바람에 겨우 두 달 만에 손을 들고 말았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태안 마도4호선 수중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해 "고려 말 충정왕으로부터 공양왕까지의 40여 년간은 조운로 개착 실패와 함께 왜구의 약탈로 인한 세곡미 운송의 부진으로 사회 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흉흉해지면서 나라가 쇠망했다"라고 당대 세곡 바닷길 운반의 중요성을 축약해 설명했다.
▲작은 선박 1척 겨우, 활용은 못해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이곳에 운하를 개통하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1395년(태조 4년)에 최유경, 1397년(태조 6년)에 남은 등이 서산과 경계 쪽에 석축을 쌓은 순제를 둘러보고 운하를 검토했다. 이상각 작가의 책 '안흥량 난행량'에서 1404년(태종 4년) 왜구가 안흥량 일대를 공격하고 1406년(태종 6년) 왜선 18척이 안흥량에 나타나 쌀 4090석을 탈취한 사건을 소개하며 "안흥량 일대에 종래에 실패를 거듭한 관류식 운하와 갑문식 운하를 혼합한 저수 갑문식 운하 건설이 건의됐다"고 설명했다. 또 '태안 마도4호선 수중발굴조사 보고서'에서는 "조선 1395년(태조 4년)에서 1455년(세조 1년)에 이르기까지 60년간에 안흥량에서 일어난 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수가 200척, 인명피해 1200여 명 사망, 그리고 미곡 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413년(태종 13년) 백성 5000명을 동원해 천수만 쪽에 3개, 가로림만 쪽에 2개의 계단식 저수지가 완성됐다. 그런데 저수지 규모가 작아서 작은 선박 1척만 겨우 통과할 뿐, 조운선에서 작은 선박으로 짐을 옮겨 실어야 했으므로 미곡 손실이 많았고, 번거로웠다. 왕조실록에 굴포 운하가 완공되었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운하는 실제로 활용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완공되었다는 기록의 말미에 '쓸데없이 민력만 낭비했을 뿐 조운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개착이 건의된 일이 있으나 모두 실패했다. 현재 뚜렷이 남아있는 운하지는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와 태안군 인평리 경계지점에 남아 있는 약 1㎞ 정도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흔적이 지금까지 남은 옛 갑문식 운하지가 우리나라 거대 토목공사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의 유적지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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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쌀과 콩을 실은 조운선의 침몰을 재현하기 위해 볏집으로 만든 쌀가마와 청자다발을 만든 모습. (사진=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
굴포운하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차선책으로 강구된 것이 의항운하의 건설이었다. 태안군 소원면의 잘록한 부분, 즉 의항리와 모항리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면 그 해역을 피할 수 있었다. 개미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개목', '개미목'이라 불렸고, 공사가 실패로 종결된 뒤에는 '무너미재', '물넘이재'라고 불렸다. 이곳은 바닷물이 닿는 거리가 2㎞ 정도이고 지표고도는 해발 20~30m에 불과해 운하를 만들면 종래 원산도에서 출발해 안흥량과 관장목을 경우하던 조운 뱃길이 관장목을 경유하지 않고도 북쪽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 태안군 소원면 송현리 무너미재를 지나 송현 저수지에 이르는 구간을 1521년(중종 16년)에 3000여 명을 동원해 굴착했으나 갯벌의 쌓임 등으로 인해 통선을 해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운하 굴착이 어렵게 되자 남쪽 천수만과 북쪽 가로림만 양안에 창고를 설치하고 창고 사이 육지는 우마차로 운반하는 대안이 추진됐다. 조운선은 안흥량으로 가지 않고 안면도 안쪽의 천수만으로 들어온 다음 남창에 사곡을 내려놓았다. 일꾼들이 세곡을 우마차에 실어 가로림만 연한 북창으로 옮기면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빈 조운선에 다시 싣고 북상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조운선이 남창 호안에 접안하기 어려웠고, 쌀을 싣고 내리고 덜컹거리는 우마차로 운반하는 중에 유실되는 양이 많아 폐지됐다.
백사수도라고도 하는 안면운하는 1623년~1649년 조선 인조 때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 신온리와의 가장 좁은 부분을 인위적으로 개착했고, 현재도 서해상의 중요 수로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진호신 국립해양유산연구소 학예연구관은 '태안 안흥량 일대 역사유적의 현황과 활용방안' 논문에 "옛날과 같이 물이 넘어가는 계단식 갑문 모형을 설치한다면 좋은 볼거리가 될 것이고, 운하의 정비를 위해서는 국가 사적지 지정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제시했다. <끝>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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