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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인숙 대전웰다잉연구소 소장 |
얼마 전까지도 안부를 주고받던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형언할 수 없는 공백으로 남았다. 누구나 한번은 맞이하는 게 죽음이라지만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타자성으로 느껴지는 낯선 두려움이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며 모습을 바꾸겠지만, 그날 이후 내 마음 한편에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덧없고 그저 한순간이라는 서글픈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슬프다는 말로는 다 담지 못할 아픔이었다.
무너질 것만 같은 세계는 야속하게도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쳐갔다. 다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게 남은 사람의 몫이지만, 마치 삶의 바닥이 날 것으로 드러난 듯 익숙하던 풍경이 낯설게 다가올 때마다 울컥해진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무심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그 사이 동생은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걸까. 이 무거운 부재의 시간을, 마치 너무나 가벼워서 먼지처럼 사라진 존재의 무력감을 말이다. 오래전에 "생때같은 자식을 앞세우고도 내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네요"라며 호곡하던 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동생과 아쉽게 헤어져 나오면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언니가 너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하며 안아주는데 "언니 그 말을 왜 이제야 해. 진작 좀 하지"라며 공허하게 웃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시간이 남아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때 잘 할 걸, 그때 했을 걸 하는 후회는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해야 할 말과 건네야 할 마음을 다음으로 미루며, 삶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은 그런 확신을 한순간 무너뜨리고 말았다.
삶은 결코 예고된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 순간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하나의 문장이 되어 다가왔다. 그 질문은 곧 삶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잘 죽는다는 말보다 먼저, 잘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삶을 바라보는 눈금이 조금 달라졌다. 오늘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것, 웰다잉은 그렇게 말보다 먼저 감각으로 다가왔다.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면? 하는 묵직한 화두 앞에 멈춰 설 때가 종종 있다. 사소한 선택 앞에서도 조금 더 신중해지려는 태도 속에서 웰다잉은 삶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지막을 향한 준비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을 더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다짐에 가까웠다. 바쁘다는 이유로 건너뛰던 안부 한마디, 언젠가 하겠다고 미뤄두었던 표현들,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삶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말과 행동은 이전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워짐을 느낀다. 그렇듯 삶은 큰 결심이 아니라 매일의 태도 속에서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웰다잉은 특별한 준비가 아니라 오늘을 대하는 행동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더 한층 받아들인다. 혼자 된 동생도 사춘기 아들과 함께 누구보다도 의연하게 삶을 디뎌가겠지. 딸부잣집 네 자매 중 막내인 육촌 동생, '란'아! 우리 더 많이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며 살자꾸나. 미루지 않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일, 어쩌면 그것이 남겨진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애도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픈 이별은 잠시 침묵 속에 멈추었지만, 그로 인해 삶은 비로소 제 속도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홍인숙 대전웰다잉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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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