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 아귀에서 시작된 현대판 '불기(不飢)', 배고프지 않음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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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칼럼] 아귀에서 시작된 현대판 '불기(不飢)', 배고프지 않음을 묻다

윤지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약데이터부 선임연구원

  • 승인 2026-05-07 17:19
  • 신문게재 2026-05-08 18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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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약데이터부 선임연구원
끝없이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존재. 우리는 흔히 그런 상태를 "아귀 같다"라고 표현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귀'(餓鬼)는 몸은 태산처럼 거대하나 목구멍은 바늘구멍보다 좁아, 끊임없이 먹어도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존재다. 심해어 아귀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실제로 아귀는 거대한 턱과 위장을 지녀 눈앞의 먹잇감을 닥치는 대로 삼킨다. 아귀의 위를 갈라 보면 아직 소화되지 않은 물고기가 통째로 쏟아져 나오는 일이 허다할 정도다. 흥미롭게도 현대 비만 치료의 핵심인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수용체 작용제의 시작은 1980년대 초 아귀의 췌장 세포 연구였다. 인슐린 분비와 혈당 조절의 단초를 이 '탐욕의 상징'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GLP-1은 반감기가 2분 내외로 짧아 약물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 연구자들의 시선을 끈 것은 미국 독도마뱀인 '힐라 몬스터'였다. 이 도마뱀은 1년에 고작 몇 차례의 사냥만으로도 꼬리에 저장한 영양분으로 버틴다. 그 침 속에서 반감기가 훨씬 긴 '엑센딘-4'가 발견됐다. 이는 오늘날 '위고비'나 '마운자로' 같은 혁신적 치료제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문을 열어줬다. 무서운 식탐을 가진 아귀와 지독한 굶주림을 견디는 독도마뱀. 이 극단적인 두 포식자로부터 '배고픔을 멈추게 하는' 호르몬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생명 현상의 묘한 아이러니다.

GLP-1은 뇌의 시상하부에 작용해 포만감을 높이고 식욕을 억제한다. 단순한 억제제를 넘어 인슐린 분비를 정교하게 조절하고 혈당 상승을 막는 '대사 조절 시스템'에 가깝다. 비만으로 고통받던 이들은 이 약물을 통해 생애 처음으로 '음식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평온함'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 현대적 기전은 400여 년 전 허준이 《동의보감》에 기록한 특정 상태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동의보감》에는 '불기'(不飢)와 '불사식'(不思食)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불사식'이 병적인 식욕 부진이나 거식 상태를 의미한다면, '불기'는 몸의 정기가 충실해져 허기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 잡힌 상태를 뜻한다. 억지로 참는 고통이 아니라, 과도한 식욕의 불꽃이 가라앉은 '평온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동의보감》은 이를 위해 황정, 천문동, 백출, 백복령, 산약, 갈근 등 다양한 약재를 제시했다. 또한 "원기(元氣)가 곡기(穀氣)를 이기면 마르고 장수한다", "위 속의 원기가 왕성하면 시간이 지나도 배고프지 않다"라며 대사 조절의 핵심이 '에너지의 효율적 운용'에 있음을 통찰했다.

최근 연구는 이러한 통찰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대표적으로 황련의 베르베린은 장내 '쓴맛 수용체'를 자극해 GLP-1 분비를 촉진한다. 인삼의 진세노사이드와 지골피 역시 유사한 기전으로 식욕 조절과 체중 억제 효과를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약재의 공통된 특징인 '쓴맛'이다. 전통 한의학에서 쓴맛은 열을 내리고 갈증을 다스리는 성질로 설명된다. 당뇨병(소갈)에 쓴 약재를 사용해 온 전통적 치료 원리가, 오늘날 '쓴맛 수용체를 통한 GLP-1 분비 촉진'이라는 생리학적 기전으로 새롭게 해석된 것이다.

처방 구조에서도 의미 있는 연결이 발견된다. 인삼·백출·복령·감초로 이루어진 사군자탕 계열은 비위 기능을 보강하는 대표적인 처방인데, 이러한 조합이 대사 조절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황기, 단삼, 산약 등이 더해지면 기운을 보하고 진액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이는 단순한 식욕 억제가 아니라, 대사 균형을 회복하여 스스로 배고픔을 조절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마음에 식탐이라는 아귀 한 마리를 키우며 살아간다. 초가공식품과 스트레스는 뇌에 가짜 허기를 심고, 우리는 욕망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비만 치료의 본질은 특정 호르몬 하나에만 있지 않다. 포식자들의 몸에서 찾아낸 과학의 열쇠와 《동의보감》이 제시한 조화의 지혜는 결국 같은 곳을 향한다. 몸 안의 감각을 깨워 과도한 열기를 식히고, 본래 가진 '불기(不飢)'의 평온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절제가 아닌 건강한 본능의 회복이야말로 대사 질환을 극복하는 가장 근본적인 길임을 고전과 현대 과학은 동시에 역설하고 있다. 윤지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약데이터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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