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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와 아키코
루루와 아키코는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변했으면….'
리야드에서 생활한 지 한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뭐 했냐면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열심히 영어 공부했다. 그건 당연한 소리고, 그냥 열심히 청소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태화고무장갑을 끼고, 외래검사센터를 광택 나게 빡빡 문지르고, 닦고, 스프레이 방향제로 향기를 팍팍 풍겼다. 청소부 라만 아저씨는 자기 밥줄 떨어진다며 로라 아줌마에게 하소연을 했다. 압둘라 닥터 칩은 내색은 안했지만 은근히 즐기는 눈치였다.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아침에 출근하면 시궁창 냄새가 나던 방이 클린 룸으로 변해있고, 향긋한 향내가 난다면….
로라 아줌마가 청소부 라만이 불평이 많다고 닥터 칩에게 일러준 모양이다. 하루는 청소부 라만이 있을 때 닥터 칩이 한마디 했다.
"그럼 일을 바꿔 해."
라만 아저씨는 그 뒤로 나에게 살갑게 굴었다.
"미스 수진, 다른 곳에 가서 소문내지 마. 나만 힘들어져. 외래검사센터에 가면 깨끗하고 향기가 좋다고, 나 눈치 봐야해. 그 애들은 손 하나 까닥 안 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한다니까. 한국인 애들, 너처럼 청소하는 애 없어. 너 때문에 나만 갈궈."
그는 하소연을 해도 꼭 불평처럼 말했다.
로라 아줌마는 근무 시간 중에 자주 자리를 비웠다. 병원 10년차 경력이다 보니 압둘라 닥터 칩도 터치 하는 일이 없다. 그녀는 여유롭다 못해 자유로웠다. 특히 오후 샬라 타임(4시쯤) 때는 한 시간쯤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이 묘연할 때가 종종 있다.
나는 그녀의 오후 농땡이 시간이 늘 궁금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그녀가 나를 꼬드겼다. 사우디 여성 직원 휴게실에 놀러 가자고. 나는 여성 휴게실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로라 아줌마는 사우디 여성 직원만 아는 전용 휴게실이 있단다. 병원장 친인척 부인들이 병원에 들를 때, 쉬어가기도 한단다.
"로라 아줌마는 사우디 여성 아, 아니잖아요." 하고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녀는 "그럼 내가 이집트 아줌마로 보여?" 했다.
점심시간, 샬라 타임을 마치고 온 로라 아줌마와 간단하게 빵으로 점심 끼니를 때웠다. 본관 2층 병원장실을 지나 사우디 여성 전용 휴게실을 찾아갔다. 로라 아줌마가 휴게실 문을 빼꼼 열었다.
한국의 직원 휴게실을 상상했다면 오해다. 그 곳은 고급 응접실이다. 뭐랄까, VIP룸 같은…. 엔티크한 가구와 소파, 바닥엔 고급 카펫이 깔려있고, 천정엔 샹들리에 조명이 달려있다. 모자이크 타일로 도배된 한 쪽 벽면엔 테이블이 놓여있고, 음료수와 간식이 차려져 있다.
서민병원이라고 말하는 이곳에 이런 시크릿 공간이 있다니…. 서민들만 모르는 귀족을 위한 티타임 공간이다. 필리핀 여성 한 명이 커피를 타서 소파에 앉아 있는 사우디 귀부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창문 쪽 소파에 한 여성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로라 아줌마와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얼른 히잡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마 내가 낯설었나 보다. 로라 아줌마가 아랍어로 한 마디 하자 그녀는 히잡을 걷었다.
"소파에 편하게 앉아요."
그녀는 자리를 권하면서 담배를 한 모금 빨아 천정으로 연기를 뱉어냈다. 로라 아줌마는 귓속말로 나에게 살짝 귀띔을 했다.
"사우디 왕가의 공주야."
로라 아줌마는 그녀와 둘 만의 대화가 있는 지, 아랍어로 샬라샬라 했다. 그녀들이 대화하는 동안 나는 사우디 왕가의 공주를 살펴봤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꼭 버지니아 슬림 여성 모델 같았다. 여성잡지에 보면 신여성을 강조하며 버지니아 슬림을 피우는 미국 여성 모델이 광고 지면에 나온다. 짧은 컷트 머리에 심플한 원색 상의, 줄무늬 치마를 입은 모델은 도도한 눈빛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 그런 매력적이고 페미니스트 같은 분위기의 모델이 지금 눈앞에 앉아 있다. 그녀는 아바야를 입고 있었지만 미국 모델만큼이나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아 참, 서번트(servant), 터키식 커피 부탁해요."
그녀는 깜박했다는 듯 필리핀 여성 직원을 불러 커피를 시켰다. 그것도 서번트(servant), 하인이라고 호칭했다. 처음엔 이름을 부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 분위기를 읽다보니 하인을 대하는 게 맞다. 역시 사우디는 왕족의 나라인 모양이다. 이런 호칭을 자연스럽게 쓰는 걸 보면…. 그녀가 페미니스트 같다는 생각이 싹 가셔버렸다.
"미스 수진, 로라가 와서 가끔 수진 이야기를 해요. 청소를 아주 잘 한다고, 마치 자기 일처럼. 압둘라 닥터 칩도 방에 들어가면 향기가 다르다고 은근히 좋아해요. 여기는 청소부가 하는 일은 손도 안돼요. 그래서 미스 수진은 어떤 여성일까 궁금했어요."
그녀는 영국식 영어발음을 구사했다. 마치 바이올린 선율처럼 우아하고, 악센트 조절과 말의 빠르기를 유연하게 가져갔다. 나는 홀린 듯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마 청소를 잘 한다는 칭찬의 말일 거라 생각했다. 여전히 영어 듣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영어가 아직 서, 서툴러서, 대, 대답을 잘 못해요. 음, 청소는 중요한 일이죠. 여기는 병원이고, 환자를 도, 돌보는 곳이죠. 어느 곳보다 깨끗해야 해요."
서툰 영어지만 그녀에게 의사표현을 분명히 했다. 나는 청소를 하인에게 시키는 잡일로 보지 않는다고.
그녀는 입술 끝을 살짝 올리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악수를 청했다.
"나는 루루에요. 여기 산부인과 의사죠."
"앗살라무 알라이쿰"
나는 아랍식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받았다. 적어도 그녀는 나를 외국 하인 취급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루루는 자기소개를 하며 이런저런 가족사를 말했다. 엄마가 미국인이고 아빠와는 이혼했단다. 알 사우드 왕가의 공주이지만 실제로는 서열이 아주 낮은 공주라고 했다. 서열이 낮아서 좋은 점도 있단다. 평민처럼 국비장학생으로 영국유학도 다녀왔고, 이렇게 자유롭게 일을 하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 그녀는 한 살 연상으로 나와 나이도 비슷했다.
나는 여전히 듣는 체질이라 그녀의 말에 가끔씩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내가 영어에 서툴다고 느꼈는지 루루는 쉬운 단어를 썼다. 이를테면 서열(personal precedence)이란 말도 My rank is low, 하며 '나의 랭킹이 낮다' 고 말했다.
"산부인과는 여기 여성에게 딱 알맞은 일이죠. 남자들이 못하니까요. 어쩌면 여성들이 그만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도 돼요. 여기는 종교의 힘이 세요.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일하는 게 쉽지 않아요. 병원을 둘러보면 알겠지만 사우디 환자만 있지, 사우디 여성 직원은 별로 없어요. 다 외국 여성들이죠. 사우디 여성들도 교육받으면 할 수 있는 일을…."
그녀는 끝 마디를 흐렸지만 나에겐 어떤 말보다도 분명하게 들렸다. 버지니아 슬림 담배를 피울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녀는 역시 페미니스트가 맞다. 페미니스트일 뿐만 아니라 종교에 불만을 품은, 이쪽으로 보면 상당히 불온 성향의 페미니스트다.
나는 그녀를 폴리티칼 페미니스트(political feminist)라고 부르기로 했다.
'맞아요. 사우디 여성도 할 수 있는 일이죠. 나는 그 전까지만 돕고 싶어요.' 하고 말해 주고 싶었다. 여전히 영어가 입안에서만 맴돈다.
"I want to be friends with you. Koreans to Saudi"
그녀에게 친구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인 대 사우디인으로. 당당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라 아줌마는 나의 당돌한 모습에 깜짝 놀랐는지 손을 뻗어 막으려 했다. 아니, 로라 아줌마가 루루 앞에서 눈치를 보다니…. 외래검사센터에서는 그렇게 자유분방한 그녀가 말이다.
루루는 한 번 방끗 웃고는 악수를 받아주었다.
"사실 궁금해서 로라에게 같이 오라고 했어요. 여기는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흐흣. 미스 수진은 영어만 잘 하면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네요."
이스탄불 세헤라자데 호텔
나는 이스탄불에서 사흘을 보냈다. 여행객들이 흔히 가는 곳을 가보고, 먹는 것을 먹어봤다. 때로는 무료함도 느끼고, 혼자하는 여행의 심플하고 자유로움도 느꼈다. 저녁 식사 후에 나는 세헤라자데 호텔로 돌아왔다.
문 앞에 새끼고양이를 한 마리 안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곰방와(こんばんは)" 하며 인사했다. 고양이 앞발을 잡고 흔들어 주었다. 첫 눈에 봐도 길냥이다. 그녀가 여행에 반려묘를 데려왔을 리는 없고, 길거리에서 주운 새끼고양이를 카와이이(かわいい. 귀여워), 하며 '쓰담쓰담' 했다. 두말 할 것 없이 그녀는 일본인이다. 나와 키도 비슷했다. 내가 동양적인 둥근 얼굴형이라면 그녀는 서구적인 브이 라인을 가진 예쁜 얼굴이다. 딱 봐도 남자들이 좋아할 타입이었다.
나와 그녀는 방금 호텔 문 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아키코'이고, 약간 무료해진 나의 여행에 동행이 될 것이며, 한 시간 후면 나 혼자서는 도무지 갈 엄두도 못 낼 이스탄불 밤 문화를 소개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이 자리에서 그녀를 자질구레하게 소개할 것 없이, 곧바로 그녀가 소개한 밤업소로 가겠다.
밸리댄스가 등장하는 터키의 술집이다. 돔 천정 아래 중앙 스테이지가 있다. 바닥은 태양이 작열하는 모자이크 타일이다. 천정에 매달린 조명이 형형색색 불빛을 내며 돌아갔다. 한국으로 보면 꼭 카바레 분위기인데, 피부색이 같은 남녀가 침침한 불빛 아래서 서로 껴안고 블루스를 즐기는 그런 곳은 아니다. 다문화가 모여 한 지붕 아래서 흔들어 댄다. 터키인도 보이지만 유럽피언 일색이다. 나 같은 동양인도 군데군데 끼여 있다.
아키코는 맥주부터 터키 술까지 골고루 시켰다. 필스너 우르겔, YENI RAKI(예니 라키), 자몽 칵테일 등등등, 그녀는 밸리댄스가 배꼽을 흔들어대며 춤을 추자, 일어나서 따라 흔들었다. 그녀의 춤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 놀아본 여자야, 뭐 이런 타입. 나의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려 예니 라키를 브라보, 하며 마시다 토할 뻔 했다. 입 안이 화끈거렸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술에 얼른 물을 탔다.
색깔이 탄산수처럼 하얗게 변했다.
나는 아키코가 마시는 무색의 예니 라키와 내가 방금 물을 부은 하얀 예니 라키를 번갈아 봤다.
'언제 이렇게 변했지' 했다. 내가 언제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나 싶었다.
부산 서면로타리에 '백악관'이란 나이트클럽이 있다. 병원 회식 날, 1차가 끝나면 2차로 가는 코스였다. 동료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해서 갔었다. 분위기는 대체로 이렇다.
년은 디스코 타임에 날뛰고 싶어 했고,
놈은 블루스 타임에 끌어안고 싶어 했다.
나는 어땠냐면, 양주에 얼음을 또 타고, 또 타서 술맛인지 맹물인지 모르게 마셨다. 동료들이 나를 끄집고 스테이지로 나가려고 하면, 술잔을 흔들며 취한 척 했다.
"아키코, 방금 술이 변했어."
"WHAT? 안 들려, 너 취했니?"
나는 술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술잔을 쨍, 하고 부딪치며 단숨에 원 샷 했다.
"호호. 난 말이야. 답답한 일본이 미치겠어. 직장에 가면 내 의견이 없어. 맹목적으로 충성하래. 지금 잘 나가는데 니 같은 여자의 의견이 뭔 필요가 있네. 이게 말이 되니? 차라리 버블이 터져서 가라앉아 버렸으면 좋겠어."
그녀의 영어가 술 취했다. 막 나간다.
빠른 음악에 맞춰 밸리댄스의 허리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주위의 박수소리와 함성이 커졌다. 밸리 댄스가 "하디, 하디" 하며, 사람들을 불러냈다. 당연히 아키코가 먼저 튀어나갔다. 육감적인 젖가슴을 철렁철렁 대는 밸리댄스를 가운데 두고, 그녀는 유럽피언들과 어울려 엉덩이를 요란스럽게 흔들었다.
문득, 사우디 공주 루루가 떠올랐다. 히잡으로 얼굴을 가리던….
그녀는 공주라서 이런 춤은 추지도 않겠지.
루루와 아키코는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변했으면….'
나는 약간 취기도 있었고, 상상 속 무대 위에 날아갔다. 그것도 여기가 아닌 톱카프 궁전 술탄이 앉은 왕좌 앞으로. 나는 하렘지구에 사는 잡혀온 여자 노예였고, 수많은 후궁 속에서 눈에 띄고 싶어 했다. 늘씬한 유러피언 후궁들 속에서, 키 작고 여위어 보이는 내가 아키코처럼 흔들어 댔다.
'내가 술탄의 눈에 띄어 왕자를 낳으면, 기필코 왕세자를 만들어서 너희 자식들은 지하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
나는 쿡쿡쿡, 하며 웃음을 쏟아냈다. 난 정말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처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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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