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초등생 꼬마가 청년의 아버지라니

  • 오피니언
  • 여론광장

[수필 톡] 초등생 꼬마가 청년의 아버지라니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20-03-27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백발의 지인 형님 내외분이 오찬 초대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타셨다.

초등생 꼬마 여아(女兒)가 앉아 있다가, 양보한 자리에 형수님이 앉으셨다. 잠시 후에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서 있는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곁에 앉아 있던 초등생 꼬마 남학생이 벌떡 일어나며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라고 하는 바람에 초등생 옆에 무심코 앉아 있던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청년이 두 꼬마의 자리 양보에 그냥 앉아 있기가 불안했던지 엉겁결에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리를 내주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벌레 씹는 상에 영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바로 곁에 앉아 있던 두 꼬마 초등생의 자리 양보에 가슴이 찔려서 자리를 내 주긴 했어도 기분이 영 안 좋은 기색이었다.



그 안 좋은 기류는 바로 표정만 보고서도 직감할 수가 있었다. 아름다운 행동 뒤에 표정도 좀 예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보는 이의 마음을 개운치 않게 하고 있었다.

자리를 내 줄 때까지의 청년의 가상스럽던 모습이 표정관리 하나 잘못으로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그늘지게 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같은 자리 양보인데도 초등생 얼굴은 생글생글 웃는 밝은 표정이었는데, 청년의 얼굴은 벌레 씹는 상에 못마땅한 표정이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청년도, 두 꼬마 초등생처럼 우러나는 마음에서 양보한 자리였다면 바라보는 이의 마음 모두가 흐뭇하고 좋았을 텐데, 아니, 아쉬움까지는 없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청년의 자리 양보 후의 표정은, 일류 배우가 아니면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연기임에 틀림없었다.

청년은 말할 것도 없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명배우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끼가 있는 연기를 더 잘해 보려다 제대로 나이 값도 못하는 함량 미달의 연출자가 되고 말았지만, 분명 명연기임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아니, 유명 배우의 명연기엔 틀림없는데, 중량 10g도 안 되는 것 같아서 꼬마 초등생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보에 개똥을 싸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배우라 그런지는 몰라도, 청년은 기림의 대상이 되는 연기로, 앙코르가 없는데도 보통 배우들은 엄두도 못 낼 분위기 반전에 선수 기질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니, 명배우의 인격에 흠집을 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비단보로 개똥을 싼 격이어서 개똥으로 비단보만 버리는 격이었다.

상황 처리 잘못으로 청년은 순간에 구설수의 주인공이 되다니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암 워즈워드의 < 무지개 > 라는 시가 출장을 나왔다가 임무수행을 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무지개

하늘에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 뛰노라.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지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소박한 경건의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윌리암 워즈워드(영국 시인)

시인이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린이의 순수성이 어른에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윌리암 워즈워드는 그렇게 노래한 것 같았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어릴 적 어린이의 순수한 가슴에 새겨진 감동과 기쁨과 그 순수성은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그 날까지 경건하게 이어져야 한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은 어른이 돼서도 간직해야 할 소중한 보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초등생 두 꼬마는 어른이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버스 안에서 고사리 손에,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수성을 가르치고 있었다.

해맑은 샘물의 마음으로 어른들에게 가슴으로 짜릿하게 느끼게 하고 있었다.

초등생 꼬마는 청년이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아버지처럼 해 냈으니, 꼬마는 청년의 아버지라 할 만하다.

초등생 꼬마가 청년의 아버지라니….

역설적 표현이지만 어른들은 가슴에 두고두고 새기며 삶의 지남차로 삼아야겠다.

어른이 됐어도 때 묻은 관습과 독선으로, 함량미달의 생각으로, 어린이의 순수성을 더럽히지 말아야겠다.

초등생 꼬마가 청년의 아버지라니….

자리를 양보한 꼬마 초등생의 순수성은, 벌레 씹는 상의 얼굴을 했던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보물로 삼아야겠다.

초등생 꼬마가 인생 연륜이나 나이는 적어도 만인의 아버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아버지란 단어는 순수성이나 사람다운 냄새로 자리매김을 해 놓은 것이리라.

우리 모두는 아버지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맥을 짚어 볼 일이다.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김해시, '김해맛집' 82곳 지정 확대...지역 외식산업 경쟁력 강화
  2. 환자 목부위 침 시술 한의사, 환자 척수손상 금고형 선고
  3. 대전서 교통사고로 올해 54명 사망…전년대비 2배 증가 대책 추진
  4. 인천 연수구, ‘집회 현수막’ 단속 시행
  5. 인문정신 속의 정치와 리더십
  1. 대학 라이즈 사업 초광역 개편 가능성에 지역대학 기대·우려 공존
  2. 대전교육청 교육위 행감서도 전국 유일 교권보호전담변호사 부재 지적
  3. "행정수도 세종 완성, 당에서 도와달라"
  4. 당진읍성광장, 주민 손으로 활짝 펴다!
  5. 교통사망사고 제로 대전 선포식

헤드라인 뉴스


충남도, 보령에 2조원 투입해 도내 3번째 AI 데이터센터 건립

충남도, 보령에 2조원 투입해 도내 3번째 AI 데이터센터 건립

충남 보령에 도내 3번째 AI 데이터센터가 들어선다. 도는 2조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해당 센터를 통해 전력 절감, 일자리 창출 등의 기대효과가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김태흠 지사는 18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김동일 보령시장, 김용호 웅천에이아이캠퍼스 대표와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 따르면 웅천에이아이캠퍼스(이하 캠퍼스)는 보령 웅천산업단지 내 10만 3109㎡의 부지에 AI 특화 최첨단 데이터센터를 건립한다. 캠퍼스 측은 민관 협력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구성하고, 내년부터 2029년까지 2조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데이터..

대전시 국방·우주반도체 공급망 중심축 만든다
대전시 국방·우주반도체 공급망 중심축 만든다

K-방산 산업의 미래 경쟁력과 국가 안보를 위한 국방·우주반도체 개발 및 제조 생태계 구축에 대전시와 산학연이 뭉쳤다. 대전시와 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화시스템, 대전테크노파크는 18일 시청에서 '국방·우주반도체 국내 공급망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협약식에는 이장우 대전시장, 이광형 KAIST 총장, 방승찬 ETRI 원장, 손재일 한화시스템㈜ 대표, 김우연 대전테크노파크 원장이 참석했다. 이번 협약은 국가 안보에 필수적인 국방·우주반도체 개발 및 제조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한다. 협약 기관들은..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 성황리 마무리… `풋살 기량 뽐냈다`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 성황리 마무리… '풋살 기량 뽐냈다'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11월 15~16일 이틀간 충남 청양공설운동장에는 선수들을 향한 환호와 응원으로 떠들썩했고, 전국에서 모인 풋살 동호인들은 신선한 가을 하늘 아래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맘껏 뽐냈다. 중도일보와 청양군체육회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하고, 청양군과 청양군의회가 후원한 이번 대회엔 대전, 세종, 충남, 충북 등 충청권 4개 시도를 비롯해 서울, 경기, 대구, 경북, 전북 등 전국 각지에서 선수들과 가족, 지인, 연인 등 2500여 명이 참여해 대회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이날..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찰칵’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찰칵’

  • 추위와 독감 환자 급증에 다시 등장한 마스크 추위와 독감 환자 급증에 다시 등장한 마스크

  • 계절의 색 뽐내는 도심 계절의 색 뽐내는 도심

  • 교통사망사고 제로 대전 선포식 교통사망사고 제로 대전 선포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