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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모로코>(1930)에서 매니시 룩을 입은 마를레네 디트리히 |
[백영주의 팜므파탈 명화살롱] 2. 마를레네 디트리히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특정한 신체부위에 고액의 보험을 드는 것이 지금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1940년대만 해도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독일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겸 가수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본인의 목소리와 양 다리에 각각 100만 달러씩의 보험을 들었다.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넘어오며 더 빛났던 허스키한 목소리와 중년을 넘어서도 유지했던 늘씬한 두 다리는 그의 팜므파탈 이미지 구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첫 직업은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이후 카바레 가수, 연극의 조연 배우 등을 전전하다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1929년 조셉 폰 스턴버그의 영화 <슬픈 천사>에서 존경받는 교사 때문에 몰락하는 관능적인 카바레 가수 ‘롤라’를 연기하면서부터다. 스턴버그 감독과는 쭉 6편의 영화를 함께 찍었는데, 이때 남자들을 유혹해 파멸시키는 파괴적인 그녀의 영화 속 이미지를 굳혔다. 나른하고 섹시한 제스처와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남성용 파티복을 입고 여성과 키스하는 등 모호한 성 정체성 역시 그녀의 매력을 더욱 배가시켰다. 이때 게리 쿠퍼와 찍은 <모로코>는 두 주연 배우를 모두 스타덤에 오르게 했고, 그가 영화 속에서 입고 나온 매니시 룩은 지금까지도 패션계에서 화자 되고 있다.
국경을 막론하고 많은 남자들이 그에게 빠져들었으며, 이는 나치의 수장이었던 히틀러에게도 해당됐다. 하지만 반 나치주의자였던 마를레네는 정부가 되어 달라는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고 급기야 1939년에는 그의 복귀 명령을 무시한 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전쟁 채권을 홍보하고, 전선 위문공연을 다녔다. 전쟁이 끝나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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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상하이 특급>(1932)에 출연한 마를레네 디트리히 |
그가 전선에서 부른 노래 중 가장 잘 알려진 노래는 <릴리 마를렌>이다.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젊은 군인이 애인 릴리를 생각하며 보초를 서다가 잠시 마주친 간호사 마를렌에게도 설렘을 느낀 것에서 노래는 시작됐다. 청년은 그날 침대에 누워 두 여인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다 둘을 한데 묶어 시를 썼는데, <릴리 마를렌>은 그 시에 곡을 붙여 나치의 군가 작곡가가 만든 노래다. 나치가 만든 군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래는 다양한 언어별 가사가 번역되면서 유럽 전역에 퍼졌고, 프랑스와 영국군 병사들의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계에서는 <악마는 여자다>를 끝으로 스턴버그와 결별한 그는 1939년 <사진(沙塵)>에서 독특한 매력을 뽐내지만 예전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배우로 성공하기 전에 올랐던 카바레 무대로 다시 눈을 돌린 그는 1950년부터 약 20여 년간 세계 최대 카바레 쇼의 진행을 맡았다. 젊은 시절의 몸매를 70대에도 유지하는 등 언제나 그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이미지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1975년에는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와 남편과 사별하는 등 불행을 맞았다. 1979년 데이빗 보위와 함께한 <오직 지골로뿐>의 촬영과 주제가를 부른 것을 끝으로 연기 인생을 마감하고 칩거에 들어갔으며, 1992년 90세를 일기로 숨졌다.
주목받았던 영화 속 배역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삶 속의 그녀 역시 남편과는 40여 년을 별거하며 수많은 이들과 염문을 뿌리는 등 화려한 남성 편력을 뽐냈다. 하지만 스타로서의 당당한 자세와 뛰어난 자기관리, 국적까지 바꾼 정치적 소신 역시 그의 매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나 싶다.
백영주 갤러리 '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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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 갤러리 '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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