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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黃喜) 정승하면 이래도 옳다, 저래도 옳다하여 도대체 어느 말이 옳다는 것이냐고 따지자 그 말도 옳다고 했다는 우유부단하지만 청렴결백했던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황희 정승의 조상이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살아서 본관이 장수(長水)이며 장수황씨 집안에서 1363년 공민왕 12년에 태어났다.
자헌대부 판 강릉 대도호부사 황군서(黃君瑞)의 아들이며 그의 조상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시중(侍中)이라는 벼슬을 지낸 황 경(黃瓊)인데 아들인 황 공유(黃 公有)가 고려 명종 조에서 전중감(殿中監)이라는 벼슬에 있을 때 이의방(李義方)의 난이 있자 전라북도 장수군으로 낙향하여 살게 되어 장수 황 씨로 불려 지게된 것이다.
태어난 곳은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 했는데 대개 훌륭한 큰 인물들은 태어난 지명도 깊은 뜻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황희 정승이 태어난 가조리 는 옳을 가(可) 도울 조(助)로 그 뜻이 올바르게 도우라는 뜻이니 바르게 임금을 돕는 정승에게 딱 맞는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명문집안에서 귀한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름을 짓는데 이름은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아 몸이 늙도록 오래오래 살라고 목숨 수(壽) 늙을 로(老) 수로(壽老)라고 지었으니 어린 애기 때부터 늙은 목숨이란 뜻의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된다. 이름 때문에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생각이 깊으며 어른 같고, 늙은이 같은 성품으로 자라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황희 초명은 수로(壽老)
성년이 되어서 이름대신 부르는 자(字)를 짓는데 구부(懼夫)라고 지었으니 두려워할 구(懼)자와 남자 부(夫)자로 두려움이 많은 남자란 뜻이 되고 용기, 패기, 결단력과 반대되는 우유부단한 황희 정승의 성품은 그의 이름에서도 나타나고, 그의 자(字)에서도 나타난다.
과거에 급제하고 호(號)를 지으니 이때는 용기를 내어 아호(雅號)를 방촌(厖村)이라 지었는데 클 방(厖), 마을 촌(村)으로 큰 마을이란 뜻의 아호이고 이때부터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함과 지혜가 뛰어나서 한번 보면 다 기억하여 그를 본 식객들은 입을 모아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우왕 2년에 14살 때 음직으로 복안궁 녹사가 되고, 21살에 과거를 보니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27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다음해에 성균관 학록에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30세 때 1392년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두문불출”이란 말이 생겼으나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 3년 1394년에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로 복직되면서 성균관 학관으로 제수되고 세자우 정자를 겸임하게 되었다.
1398년에 문하부습유 재직 중에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했다는 죄로 문책되어 경원교수로 밀려났다가 정종임금이 즉위하자 복직되고, 다음해에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문하부 우보궐에 복직되었다가 언사로 또 파직되며 입조심 말조심을 깊이깊이 새기게 된다.
그 이후에도 경기도 도사를 거쳐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 예조, 이조, 병조 정랑을 두루 역임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되고, 병조의랑에 체직되었으나 1402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였으나 곧 군기를 관장하는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된다.
1404년에 우사간대부, 승정원 좌 부대인, 승정원 지진사로 승격되고, 이어서 참지의정부사와 형조판서에 오르고, 지의정부사와 대사헌을 엮임 하였으며 1411년에는 병조판서, 1413년에는 예조판서를 지내고, 1415년에는 이조판서로 승승장구 발전을 거듭한다.
이조판서 때 소송사건 처리에 육조의 문책과 함께 파직되었다가 그해에 행랑도감제조 라는 직위로 복위되었다가 호조판서를 엮임하고, 양녕대군의 실수를 옹호하다가 또 파직되고, 다시 또 공조판서로 부임하고, 1418년에 판 한성부사가 되었으나 양녕대군 세자폐출을 반대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또 파직당하고, 교하(交河)에 유배되었으나 세종임금의 치세가 진행되면서 상왕인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고 1423년에 다시 예조판서에 발탁된다.
1426년에 드디어 우의정에 오르니 정승이 된 것이다. 우의정 겸 판병조사를 겸임하다가 다시 좌의정 겸 판 이조사로 있다가 이번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였으나 곧 다시 좌의정에 복직되고, 1431년에 임금 외에 국정의 최고위치인 영의정에 올라 18년 동안 명재상으로 세종대왕이 많은 업적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여러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면서 황희정승의 처세술은 입조심 말조심을 엄하게 하여 누구를 험담하거나 비난비방을 하지 않으며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듣고 대화로 설득하는 처세술로 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황희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였다 하고, 청렴결백하고 충효가 지극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세종대왕 말기에 조정에서는 불교를 숭상하는 숭불세력과 공자의 인(仁)을 바탕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유학자 세력의 중신들 사이에서 갈등과 마찰을 중화시켜 왕을 보필하는데 황희정승의 역할이 빛나게 되었다.
세종31년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서도 세종대왕은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황희 정승을 불러 자문을 구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3년 동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90세에 생을 마쳤다.
집이 높으니 더위가 물러가고(軒高能却暑), 처마가 트였으니 바람 쉽게 들어온다(簷豁易爲風) 고목나무 그늘이 땅에 드리우고(老樹陰垂地),먼 산봉우리 비취색하늘을 쓸어낸다(遙岑翠掃空) 황희 정승이 지은 관풍루(觀風樓)라는 이 시의 구절 속에서도 그의 여유로운 성품이 보이고, 대추 볼 붉은 고을에 알밤은 어이 떨어지며, 벼 베어낸 논에는 계가 기어 다니네,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가니 아니 먹고 어이하리……. 붉게 잘 익은 대추와 알밤, 벼를 베어낸 논에 기어 다니는 계는 풍요로운 가을을 나타내고, 잘 익은 술에 술을 거르는 체 장수의 나타남은 평화로운 태평성대의 표현이다. 황희정승이 지은 이 시의 구절 속에서도 그의 성품이 녹아 있다.
황금빛으로 벼가 익어가고, 대추가 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이 좋은 가을에 우리는 ‘수소폭탄’이라는 가공할 위력의 대량살상무기 핵실험소식을 접하고 있다. 김정은은 무엇을 위한 정치를 하는지, 만백성이 원하는 태평성대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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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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