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까지 4박5일간 미국 방문길에 오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임진왜란 전 동인과 서인이 일본에 가는 느낌이라며 전술핵 재배치를 요구하겠다고 했다. 스스로 동인 같든 서인 같든 생각은 자유다.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서인 황윤길은 선조에게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보고했다. 동인인 김성일은 병화가 없다고 했다. 우리 정치권과 싱크로율이 높다. 왕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김새를 물었다.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력이 있는 사람인 듯합니다"라고 아뢴다. 반대 당의 김성일은 그 반대다.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눈은 쥐 같으나 눈빛은 반짝인다는 답을 얻고 전쟁에 대비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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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용(龍) 깃발. |
역사적으로 화려한 '랩 배틀'로 척화론의 김상헌과 주화론의 최명길을 꼽는다. 병자호란에서 못 이길 것을 피차 알지만 대처법은 딴판이다. 세계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와 실록을 보면 김상헌이 청나라에 보내는 항복문서를 찢는다. 국서 원본이 따로 있을 텐데도 최명길은 찢긴 문서를 이어 붙인다. 둘의 대조 성향을 극대화한 장치이면서 사실(史實)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만 역사나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주삿바늘 효과나 방아쇠 효과, 마법의 탄환 이론처럼 어떤 미디어가 근본 인식 틀과 행동의 촉발 요인이라며 꿰맞추다가 그 프레임에 갇히고 만다.
그러다 보니 영화 보고 나면 로맨티스트나 애국자가 되어 있어야 타당한 줄 안다. 보름달 뜨면 봉화가 올라가리라고 믿는 김상헌과 보름달 뜨기 전 투항하자는 최명길에서 명분과 실리 싸움만 읽으려 한다. 44년 전의 임진왜란을 겪은 뒤, 아니 왕이 강화도로 도망쳤던 9년 전 정묘호란 뒤에 대비했어도 청 황제 앞에서 조선 왕이 무릎 꿇는 국제적 쪽팔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희소하다. 번번이 당하고 정신줄 놓다가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었다. 누구 말을 듣고 안 듣고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잊은 탓이다. 알고도 외면한 탓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남한산성의 수모가 새겨진 삼전도비를 뽑아버리라고 지시한다. 땅에 묻었지만 장마에 드러났다. 묻거나 찢는다고 치욕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찢은 국서를 이조판서 최명길이 주워 붙인 기록은 병자록과 연려실기술에도 나온다. 최순실 태블릿PC와 끄적거린 업무일지에 발칵 뒤집힌 대한민국과 대조되는 기록의 나라 조선답다. 자신을 묶어 차라리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달라는 김상헌, 대감이 찢었으니 제가 줍겠다는 최명길의 대립 구도도 역사의 서술이다.
우리 현실에는 그렇게 발전적이지 않은 대립이 많다. 여야 정치인들이 미국을 다녀와 서인과 동인처럼 상반된 해석을 늘어놓았다. 이런 일은 흔하다. 영화 '남한산성'을 본 홍준표 대표는 "지도자의 무능과 신하들의 명분론 때문"이라 했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의 잘못된 현실 판단과 무대책의 명분"을 짚어냈다. 그 말이 그 말인데, 각각 현 정부와 전 정부에 화살을 겨눴다. 그러니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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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충식 논설실장 |
그들만의 허접한 랩 배틀보다 381년 전 조선과 현재의 대한민국이 큰 차이 없다는 어느 관람자의 평이 마음에 더 닿는다. 대처 방식이 극과 극인 김상헌과 최명길이지만 나라와 백성 사랑하는 정신은 다르지 않았다. 북핵 위기 등 국가적 난제 앞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의 정치문법과 신물나는 정신승리법에 도취된 현 정치인들은 어떤지 자문해봐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위정자들이 보복 걱정이 없다던 사드호란(2016~?) 국면을 맞은 것도 말하자면 그것이다. 정묘·병자년의 호란(胡亂)은 아직도 효력을 지닌 예고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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