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출처=KGC인삼공사 정관장 공식블로그 |
그 공으로 1832년(순조 32) 곽산군수(郭山郡守), 1835년엔 구성부사(龜城府使)에 발탁되었다. 그 후로도 그는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 작가 최인호에 의해 소설 <상도(商道)>와 드라마로도 발표된 바 있는 그는 계영배(戒盈杯)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참고로 '계영배'는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만든 잔이다. 술잔을 가득 채워서 마시지 못하도록 술이 어느 정도까지 차면 술잔 옆의 구멍으로 새게 되어 있다.
이는 그러니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자 했던 그만의 어떤 트레이드마크였던 셈이다. 그는 또한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 즉, 재산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사관의 소유자였다.
임상옥은 평안북도 의주에서 보따리장사를 하던 집안의 사람이었다. 스무 살이 된 임상옥은 아버지를 따라 중국 연경에 가 크게 돈을 번다. 그러던 중 아버지에 의해 중국으로 팔려온 여인 장미령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번 돈으로 그녀를 산 후에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다.
이 일로 상단의 돈을 함부로 썼다는 이유로 의주 상단에서 쫓겨나게 된다. 상단에서 쫓겨난 후 임상옥은 추월암이라는 암자에 들어가 스님이 된다. 여기서 만난 석숭스님은 큰 위기를 만났을 때 보라며 '죽을 사', '솥 정'이라는 두 글자와 '계영배'라는 술잔까지 모두 세 가지의 선물을 준다.
다시 장사를 시작한 임상옥은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그러던 중 임상옥 상단이 파는 인삼이 너무 비싸다며 값을 내리라고 강요하는 베이징 상인들 때문에 인삼을 헐값에 팔아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는 점점 더 심해져 나중에는 인삼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임상옥은 석숭스님이 주었던 글자 중 '죽을 사'를 보며 깨달음을 얻고, 자신이 파는 인삼을 불태우려 한다.
그러자 베이징 상인들은 인삼불매운동을 멈추었고 임상옥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다. 그렇게 위기를 넘고 거상으로서 명성을 더욱 떨치던 임상옥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만난다.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가 임상옥을 찾아와 자신과 함께 세상을 바꿔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임상옥은 홍경래의 제안에 밤을 새워 고민한다. 그러던 중 석숭스님이 주었던 글자 중 하나인 '솥 정'자의 진정한 의미를 깨치게 된다.
'솥 정'에는 인간에게는 솥의 세 다리처럼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이라는 세 가지 욕심이 있는데 이 셋을 모두 가지려 하면 솥의 다리가 사라지고 솥이 쏟아지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즉, 돈을 가진 임상옥이 홍경래를 따라 권력과 명예까지 탐하게 되면 솥이 넘어지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올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임상옥은 결국 홍경래의 부탁을 거절하여 목숨과 상단을 지키게 된다.
임상옥은 홍경래의 난에 참여했다가 죽은 친구의 딸인 송이와 혼인한다. 그러나 대역죄인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임상옥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임상옥은 석숭스님이 준 마지막 선물인 계영배라는 술잔의 의미를 거듭 생각해본다.
그러던 어느 날 비변사(임진왜란 때 세워진 군사기구)에서 조상영이라는 관리가 나와 계영배로 함께 술을 마시게 된다. 그런데 조상영은 술을 가득 채울 수 없는 계영배 때문에 화가 나 계영배를 던져 깨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 임상옥은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다. 임상옥 집안의 보물이었던 계영배를 깬 것이 미안했던 조상영이 임상옥이 풀려날 수 있게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이렇게 계영배로 위기를 모면한 임상옥은 계영배를 만든 석숭스님을 찾아가지만 석숭스님은 계영배가 깨지던 날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임상옥은 돌아가신 석숭스님을 떠올리며 지나치게 욕심 부리지 않고 현재 상황에 만족하며 살 줄 아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계영배의 가르침을 새삼 깨닫게 된다. 계영배의 가르침을 천착한 후 임상옥은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장사를 접고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한다.
그렇게 혼자 조용히 살아가던 어느 날, 임상옥은 자신이 기르던 닭을 솔개가 날아와 잡아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다. 임상옥은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빚을 없애주고 금덩이까지 하나씩 주어 돌려보낸다.
이상은 각종의 자료와 검색 등을 통해 찾아본 임상옥 관련 '칭찬'이다. 이처럼 임상옥은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다가 죽었다. 이는 '생로병사'를 순순히 받아들인 그의 초연함과, 대인배적인 긍정 마인드가 그 토대를 이룬 덕분이다.
반면 여불위(呂不韋)는 중국의 전국시대 말, 천하의 거상(巨商)이었다. 하남성 양책 출신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해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 조나라 수도 한단에 인질로 와 있던 진 왕족 자초와의 만남이 그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자초를 보자 '이 진귀한 '물건'은 사 둘만 하다!'는 천부적 장사꾼다운 머리가 홱 돌아갔다. 자초 역시 여불위의 자신을 향한 '투자' 제안에 동의하면서 계획대로 된다면 진나라를 함께 나누어 가지겠다고 화답한다.
여불위는 진 태자 안국군의 처 화양부인을 설득하여 자초를 양자로 만든다. 집권한 소양왕이 죽자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즉위했으나 3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자초가 뒤를 이으니 이가 장양왕이다.
한데 장양왕도 3년 만에 병사하니 13세 아들 영정이 제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후일의 '진시황'이다. 그런데 진시황이 사실은 여불위의 소생이라는 설이 분분했다. 사마천이 쓴 사기 <진시황 본기>에는 없지만 <여불위 열전>에는 그의 아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초가 여불위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가 총애한 여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해 아내로 삼는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여불위의 아이를 가진 사실을 숨긴 채 자초의 여인이 되었고 결국엔 진시황을 낳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영정이 진왕에 오르자 여불위는 재상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진시황 역시 그를 중부(仲父)라 부르며 총애했고 국사까지 위임했다. 그렇지만 여불위는 항상 좌불안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아킬레스건인, 진시황의 생모인 태후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그로선 결정적 악수(惡手)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신하로서 언감생심 태후와 정을 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모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꾀를 부려 노애라는 젊은이를 태후에게 붙여주었다. 현대판 '카사노바'였던 그는 직업 없이 지냈을 당시에도 무수한 여인들과 통정하고 심지어는 기둥서방 노릇까지 하면서 풍족하게 먹고 살았다고 한다.
여불위로 말미암아 태후 조희와 사통하게 된 노애는 하루가 다르게 욱일승천의 기세로 호가호위(狐假虎威)를 일삼았다. 선천적으로 남자를 좋아했던지 아무튼 조희 역시 노애에게 푹 빠져 아이까지 둘을 낳았다.
간까지 풍선처럼 커진 노애는 태후를 꼬드긴다. 자신과 태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진시황 대신 왕으로 세우려 꾀했다. 그러나 중간에 들키자 옥새를 위조해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반란은 단박 진압당했고 노애는 거열형에 처해져 조각난 시체는 진나라 곳곳에 조리돌림을 당했다. 태후가 낳은 아이들 또한 자루에 넣어져 몽둥이에 맞아죽었다. 노애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는 진압의 의미로 그의 성기를 대문에 걸어놓았다는 설도 있다.
여불위는 자신의 권력지속과 영달(榮達)의 도모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계속했다. 자초를 통한 거래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아이까지 임신한 여자를 그에게 덜컥 주었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정상적 사람의 범주를 넘어섰음의 자충수까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노애가 천하의 간신이었던 환관 조고(趙高) 이상으로 호가호위에 더한 치마양반(신분이 낮으면서 신분이 높은 집과 혼인함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된 사람)처럼 행세를 하는 내내 여불위는 그렇다면 꼼짝없는 '노예'의 처지로 전락했으리라.
노예(奴隸)는 과거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상대로 행해져 왔던 그 끔찍함의 노예들처럼 예속과 부자유 따위의 부작용을 수반한다. 노예는 남의 소유물로 되어 부림을 당하는 사람인 때문이다.
모든 권리와 생산 수단을 빼앗기고, 물건처럼 사고 팔리던 노예제 사회의 피지배 계급이었던 노예는 주인에게 갖은 학대와 부림을 받았기에 그들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임상옥은 현명했다. 그래서 그는 말년까지 술과 시를 즐기다 죽을 수 있었다.
반면 여불위는 그 많은 재산을 남기고도 귀양 간 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만약에 여불위가 과욕을 참았더라면 그는 역시도 임상옥처럼 천수를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뭐든 그렇겠지만 과욕은 화(禍)의 초대장이다.
여불위는 하나만 소유하기에도 벅차거늘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이라는 세 가지 욕심을 모두 탐했다. 그게 바로 그의 결정적 실책이었다. 임상옥이 홍경래를 좇아 권력과 명예까지 탐했더라면 그 역시 여불위 짝이 나지 않았을 리 없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김의화 기자


![[기획시리즈] 2. 세종시 신도시의 마지막 퍼즐 `5·6생활권` 2026년은?](https://dn.joongdo.co.kr/mnt/webdata/content/2025y/12m/16d/55255.jpe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