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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인 민족 대표의 독립 선언=민족 기록화 |
일본이 침략하여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강제로 한일 합방을 선언한 뒤 일본은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화 하려하였다.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사(義士)와 열사(烈士), 그리고 수많은 의병(義兵)들이 독립운동에 나서자 일본 총독부 산하의 왜경들은 강력한 무단으로 한민족 압살정책을 강화하여 가혹한 탄압을 수없이 자행하며 민족문화를 말살 하고, 경제적 약탈과 지배를 강화하며 우리민족의 정당한 민족적인 저항의 기반을 뿌리 채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의 글자인 한글도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고, 우리나라 대대로 이어오던 성씨마저 일본식 성씨로 창씨개명을 하게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려고 하자 우리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으로, 만주지방으로, 노령지역으로, 미주지역으로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지하로 숨어 은밀히 활동하며 비밀리에 자주독립의 기회를 만들어 가게 되었다.
이 무렵에 제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원칙 14개 조항의 일부로 1918년 1월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원칙"을 발표하고,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구체적으로 연합국과 대결하였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터키 등에 속하여 있던 식민지에만 적용하려던 의도였으나 이 원칙은 모든 피압박민족에게 하나의 복음이요 천명으로 받아드려졌고, 각각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 원칙을 해석하며 민족의 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민족 지도자들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발표가 있자 이를 근거와 기회로 삼아 일본으로부터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며, 미국에 있던 재미(在美)한국인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을 한인대표로 선출하여 민족 자결주의의 본질적인 이념에 따라 우리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미국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으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은 중국 상해에서 발행하는 영자 신문에 보도된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민족자결주의 보도를 보고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에서 김규식(金奎植)을 한민족대표로 파리로 파견하면서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으로 파견하고, 여운형(呂運亨)을 시베리아로 파견 하고, 김 철(金 澈)과 선우 혁(鮮于 赫)을 국내로 파견하여 종교계를 비롯하여 사회 각 계층의 지도층과 뜻을 모으며 민족적이고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9년 1월 6일에는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제로 하는 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일본내각과 각국의 대사관과 공사관에 청원서를 낼 것을 결의 하였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 및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하면서 송계백 과 최근우를 국내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최 린, 송진우, 최남선, 현상윤 등과 뜻을 모아 국내에서도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독립선언서 등 각종 인쇄물 제작에 필요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갔다.
1919년 2월 8일에는 드디어 한국독립의 필연성과 정당함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등을 각국의 대사와 공사 앞으로 보내고, 일본의 정부요인과 귀족원, 중의원, 양원의원, 조선총독과 각 신문사와 잡지사, 교육계와 학자들에게 일제히 우송하였다.
이날 오후 2시에 일본에서는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 독립단의 이름으로 최팔용, 송계백, 서 춘, 김도연,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김상덕, 최근우, 이광수, 김철수 등 11명의 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하고, 이어서 김도연이 독립결의문을 낭독하자 온 장내에서 "대한독립만세"소리와 박수갈채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이때 일본 동경 경시청에서 급파된 일본 경찰대가 대회장을 포위하고 행사장 안으로 진입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이광수를 제외한 열 명의 대표가 모두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날 2월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독립선언은 우리나라의 청년학도들이 일본의 수도인 동경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을 하였다는 큰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다 국내에서 3.1 독립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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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뒤에 비밀리에 숨어서 자주독립운동을 진행하면서 기회를 보던 민족 지도자들은 절호의 기회가 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3월 1일에 거국적으로 민족독립을 만방에 천명하기로 하고 종교단체와 교육기관에 독립운동 추진계획을 세우는 한편, 천도교를 이끌던 손병희(孫秉熙)와 힘을 합치고 첫째 독립운동을 대중화 할 것, 둘째 하나로 일원화 할 것, 셋째 비폭력적으로 할 것. 이세가지 원칙을 정했다.
실천방법으로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국민여론을 환기시키고 일본정부와 일본총복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유림을 포함하여 각계각층의 민족지도자를 총 망라하여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최남선이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쓰고 민족대표 33인이 보완하여 2월 27일부터 비밀공간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하여 3월 3일 고종의 장례일로 정하였다가 고종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일부 여론이 있었고, 3월 2일은 일요일이라서 기독교인의 반대가 있어 거사일은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3월1일 대한독립 만세운동은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동시다발로 힘차게 일어나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29년이 지나 1948년에 드디어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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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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