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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牧隱) 이색(李穡)은 1328년생으로 경상북도 영해읍 괴시리 호지마을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영숙(潁叔)이고 목은(牧隱)은 아호(雅號)이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정치일선에 나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사양하고고향으로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며 지냈다.
20세 때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습득하고 1352년에 귀국한 이색 은 공민왕 1년에 토지제도의 개혁과 국방개혁을 주장하고, 교육의 진흥, 토지문제, 불교의 억제 등을 건의문으로 작성하여 왕실에 올렸다.
1353년에 향시(鄕試)에 나가 장원급제하고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원나라에서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전시(展試)에서도 합격하였으며, 응봉(應奉) 한림문자(翰林文字) 승사랑 동지제고(同知制誥) 겸 국사원(國史院) 편수관(編修官)의 벼슬도 지냈다.
1355년에 고려에 돌아와서 전리정랑, 내서사인 벼슬을 역임하기도 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팔사(時政八事)를 지어 올렸다. 1367년에는 대사성에 제수되어 정몽주(鄭夢周)와 이숭인, 김구용과 더불어서 "정주 성리학(程朱 性理學)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유생들을 육성하는데 핵심적인 공헌을 하였다.
1373년에는 한산군 에 봉해지고, 1386년에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우왕 의 사부가 되고, 문하시중 에 등용되었다. 1389년에는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도로 쫓겨나자 창왕을 옹립하고 왕으로 즉위토록 했다. 위화도 회군문제로 군령을 위반하였고, 왕명을 거역한 문제로 논란이 일자 장단으로 유배를 가게되자 청주를 경유하여 강진에 머물다 석방되고 한산백 에 봉해졌다. 3년 뒤에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한양에 돌아와서 이성계의 정계출사를 끝내 거절하고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장백산은 높아서 활등처럼 펼쳐졌고, 철령의 관문은 산비탈이 높은데, 몇 천리 이런가 가로 뻗어났으니 천연의 요새라 넘을 수가 없어라." 이색(李穡)이 지은 시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생으로 목은 이색보다 아홉 살 아래가 된다.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우향리에서 출생했다. 어머니가 임신하고 꿈을 꾸었는데 난초화분을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아서 처음에는 이름을 꿈 몽(夢)자와 난초 난(蘭)자를 써서 몽란(夢蘭)이라 부르다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또다시 꿈에서 용이 나타나서 정원에 있는 나무위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몽란(夢蘭)을 몽룡(夢龍)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 후에 성년이 되자 몽주(夢周)로 또 개명을 한 것이다.
정몽주 는 열네 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공민왕 9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치고 예조정랑 과 사성이 되었다. 정몽주도 이색처럼 서장관으로 뽑혀서 명나라에 들어가 명나라태조 주원장을 만나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를 좋게 하였다. 명나라에서 귀국하여 주원장과 주고받은 외교문서와 칙서를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은 정몽주의 손을 잡고 칭찬을 거듭하며 어주(御酒)와 상을 내리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 시켰다.
창왕 1년에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고,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세우고, 좌명공신으로 추대되었으나 이성계가 고려사직을 끝내고 조선건국을 함께하기를 수차 권했으나 끝내 거절하자 선죽교 다리위에서 이성계의 셋째아들 이방원에게 암살 되고 말았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 속에 정몽주의 충절이 가득하다.
고려 삼은 중에 또 한사람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있다.
1353년에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난 길재(吉再)는 아호(雅號)가 야은(冶隱)이고 금오산인(金烏山人)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부친은 길원진(吉元進)이며 18세에 상주 박분을 찾아가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색과, 정몽주, 권근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도학을 닦았다.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 로 문서를 관리했다. 고려가 쇠망하자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합류하지 않고, 노쇠한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핑계로 벼슬길을 버리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금오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시냇가 초가집에서 한가하게 살아가니, 달 밝고 바람 맑으면 흥취가 넘쳐난다.
찾아오는 손 없으니 산새와 말 건네고, 대숲 언덕으로 상을 옮겨 누워서 책을 본다."
길재가 지은 '고요하게 살며' 라는 제목의 시다. 옛 선비들은 아무리 성공 출세와 부귀공명의 기회가 와도 초개와 같이 미련 없이 버리고, 의(義)를 지켜 낙향을 망설이지 않았고 고향에서 은둔하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만족할 줄 알았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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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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