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웁살라의 한 여인

  • 오피니언
  • 세상속으로

[세상속으로]웁살라의 한 여인

김명주 충남대 교수

  • 승인 2019-04-15 14:19
  • 신문게재 2019-04-16 22면
  • 이상문 기자이상문 기자
김명주-충남대-교수
김명주 충남대 교수
지난해 9월 말 논문 발표 차 스웨덴 웁살라대학에 갔다. 일찌감치 찾아온 북구의 겨울을 예상치 못한 나는 그곳에 머무는 내내 찬바람 속에서 숙소와 회의실만 오가며 종종걸음 쳤다. 외국인에 대한 그들의 냉랭함은 추위만큼이나 쌀쌀했다. 유럽 학회에 갈 적마다 느끼는 소외감, 낯선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무심함을 난 유럽 중심주의적 오만함이라 여기며 늘 불만스럽게 그들을 경계했다. 몸도 마음도 모두 추웠다.

학회 마지막 날, 아침 일찍 라운드 테이블에 가려고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널찍하고 쾌적한 회의실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20여 명 앉을 수 있는 공간에서 어디든 자리 선택이 가능해진 나는 입구에서 가장 먼 쪽에 한 자리를 잡고, 그 옆자리에 가방을 놓았다. 즉, 나 혼자 자리 두 개를 차지한 셈이다. 식당이든, 도서관이든, 강의실이든, 자리를 잡고 앉으면 가방은 언제나 옆자리에 놓는 것이 거의 습관이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 것이 꺼림칙하고, 자리가 모자랄 염려는 불확실하며 시기상조라고 변명하면서. 실은 마음 깊은 곳, 내 옆에 아무도 앉지 않길 바라는, 나 혼자 편하고 싶은 파렴치한 이기심도 없지 않다. 으레 것 그래 왔으니 딱히 문제의식이 없었다.



잠시 후 젊고 키 큰 여성 학자 하나가 씩씩하게 들어오더니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는 잠시 두리번거리고는 자신의 가방을 멀찌감치 창틀에 휙 던지고, 내 옆, 정확히 말해서, 내 가방이 놓인 의자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빈자리가 수두룩했으니 그녀는 얼마든지 옆자리에 자기 가방을 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 두어 걸음 떨어진 창틀에 가방을 놓은 것이다. 순간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나의 이기심이 적나라하게 들켜버린 것이다. 20개 의자가 있는 공간에서 지금은 우리 둘밖에 없기 때문에 빈지리가 많지만, 그 회의실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는 오직 하나라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의 한계를 그녀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를 박탈당했다면, 당연히 그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해야 한다. 동시에, 나의 권리만큼이나 소중한 타인의 권리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의식이다. 그렇다면 두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은 비민주적인 탐욕이다. 나는 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비민주적 행위임을 의식하지 못했고, 그녀는 민주의식을 일상 속에서 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망신당한 기분으로 나는 얼른 내 가방도 그녀처럼 창틀에 올려놓았다. 라운드테이블이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자, 20개의 자리는 점차 사람들로 꽉 채워졌다. 재빨리 가방을 옮겨놓지 않았더라면 더욱 망신스러울 뻔 했다.



라운드테이블에서 둘씩 짝지어 자신의 소감을 나눴다. 당연히 난 옆자리 그녀와 짝이 되었다. 그녀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갖게 된 나는, 학회의 배타적 분위기, 주최 측의 환대부족 등에 대해 솔직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조용히 경청했다. 마침내 200여 명이 모이는 최종 전체회의가 열렸다. 차기 학회 개최문제, 학회운영, 문제점 등에 대해 토의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바로 그녀가 번쩍 손을 들더니, 친밀한 분위기에서 고백했던 학회에 대한 나의 해묵은 비판을 공식적으로 문제화했다. 외국인들을 환대하는 모임을 따로 마련하자는 제안이었다.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와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개인의 문제의식을 정치화하는 그녀의 일상화된 민주의식은 참 존경스러웠다. 발표한 내 논문이 주목받지 못해 학문적 성과는 '별 거' 없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두고두고 '별 거'가 될 것 같다.
김명주 충남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노희준 전 충남도정무보좌관,'이시대 한국을 빛낸 청렴인 대상'
  2. 천안문화재단, 2026년 한 뼘 갤러리 상반기 정기대관 접수
  3. 천안시농업기술센터, 2026년 1~2월 새해농업인실용교육 추진
  4. 천안법원, 토지매매 동의서 확보한 것처럼 기망해 편취한 50대 남성 '징역 3년'
  5. [독자칼럼]센트럴 스테이트(Central State), 진수도권(眞首都圈)의 탄생
  1. 천안중앙도서관, '1318채움 청소년 놀이터' 운영
  2. 대전 아파트 화재로 20·30대 형제 숨져…소방·경찰 합동감식 예정
  3. 은둔고립지원단체 시내와 대전 중구 청년센터 청년모아 업무협약
  4. 백석대학교 물리치료학과, 성장기 아동 척추 건강 선제적 관리 나서
  5. [날씨]28일까지 충남 1~3㎝ 눈 쌓이고 최저기온 -3~1도 안팎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반대 여론` 어쩌나

대전충남 행정통합 '반대 여론' 어쩌나

대전·충남 행정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가운데 지역사회에서 주민 동의가 필요하다며 '신중론'이 나오고 있다. 대전·충남 행정통합은 이달 초 이재명 대통령이 내년 지방선거 전 추진 의지를 밝히면서 강한 추진 동력을 얻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충청지역 발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내년 3월까지 통합 관련 법안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대전·충남 행정통합의 시작점인 김태흠 충남지사와 이장우 대전시장도 24일 만나 통합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대전·충남 행정통합에 속도를 내면서 지역에서 '주민 의견 부족' 등 졸속 추진에 대한 우려..

대전·충남통합 추진 속 민주당 대전시장 후보 경쟁 `3자 구도`로
대전·충남통합 추진 속 민주당 대전시장 후보 경쟁 '3자 구도'로

대전·충남통합 추진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대전시장 후보 경쟁이 3파전으로 재편된다. 출마를 고심하던 장종태 국회의원(대전 서구갑)이 경쟁에 뛰어들면서다. 기존 후보군인 허태정 전 대전시장과 장철민 국회의원(대전 동구)은 대전·충남통합과 맞물려 전략 재수립과 충남으로 본격적인 세력 확장을 준비하는 등 더욱 분주해진 모습이다. 장종태 국회의원은 29일 대전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전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그동안 장 의원은 시장 출마를 고심해왔다.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며 민주당의 대전·충청권 지방선거 승리를 견인해야 한..

정부 개입에 원·달러 환율 1440원대 진정세… 지역경제계 "한숨 돌렸지만, 불확실성 여전"
정부 개입에 원·달러 환율 1440원대 진정세… 지역경제계 "한숨 돌렸지만, 불확실성 여전"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원·달러 환율이 정부의 본격적인 시장 개입으로 1440원대로 내려앉았다. 지역 경제계는 가파르게 치솟던 환율이 진정되자 한숨을 돌리면서도, 불확실성은 여전하다며 우려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28일 금융시장과 지역 경제계 등에 따르면 지난 26일 서울 외환시장에서의 원·달러 환율 주간거래 종가(오후 3시 30분 기준)는 1440.3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달 4일 1437.9원 이후 약 한 달 반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환율은 지난주 초 1480원대로 치솟으며 연고점에 바짝 다가섰으나, 24일 외환 당국의..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세밑 주말 만끽하는 시민들 세밑 주말 만끽하는 시민들

  • 유류세 인하 2개월 연장…기름값은 하락세 유류세 인하 2개월 연장…기름값은 하락세

  • 성탄 미사 성탄 미사

  • 크리스마스 기념 피겨쇼…‘환상의 연기’ 크리스마스 기념 피겨쇼…‘환상의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