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

  • 오피니언
  • 여론광장

[수필 톡]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20-04-10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

흘러간 세월이 40년이 경과했는데도 청순한 여고생의 목소리가 지금도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다. 이 때가 바로 대전여자고등학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대전여자고등학교는 까만 베레모에 이른바 '몸빼' 바지가 교복이었는데 당시 여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동경하고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전국의 명문고였다.

그런 명문고에 교직생활 신출내기인 내가 초임지 충남 덕산고등학교에서 어려움 없이 들어갔다. 같이 근무하던 이용만 선배가 1년 먼저 가시더니 학교장께 어떻게 말씀드렸는지 그냥 오라 하시기에 별 생각 없이 마음 결정을 내렸다.

그 당시 나는 초임 발령이라서 경력도 없고, 키가 작아 난쟁이라는 별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시절이었는데 충남에서 대전 들어오기는 보통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전에 있는 명문고로 불려왔으니 얼떨떨한 것 그 자체였다.

할애 내신 종이쪽지 한 장으로 뽑혀간 셈이었으니, 그 이유가 전국에서 키가 제일 작은 난쟁이 교사라서, 아니면 좀 괜찮은 교사로 낙점을 받아서였는지 아리송할 때가 있었다. 가자마자 무슨 대가(代價)인지는 모르지만 3학년 담임이었다.

그 당시 대전여고 학생들 수준은 전국의 명문고답게 어느 반을 들어가도 중학교 때 성적이 1, 2등 아닌 학생이 없을 정도 수재들이었다.

공부를 잘하고 머리가 좋기도 했지만 별나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어서 수업 시간에 코피 흘리는 학생이 평균 둘 정도는 나왔다. 아마도 밤잠 못 자고 공부하는 열정이 만들어 놓은 결과였을 것이다.

여학생들이라 수업 중 코피를 쏟으면 호들갑을 떠는 야단법석들이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빙긋이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나더러 선생님은 피만 보면 좋아하는 미소가 나오니 드라큘라(흡혈귀)가 아니냐고 했다.

내가 지은 미소의 의미는 학생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대견스럽고 기특해서 지은 표정이었는데 학생들은 흡혈귀의 속성으로 규정지어 내린 장난끼 어린 언사였다.

방과 후 자율학습시간이나 야간자율 학습시간에 학생들이 문제집을 들고 와,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라고 할 때는 끔찍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유는 가지고 온 문제집 참고서를 펼쳐 놓고 질문을 하는데 이것은 한 두 문제가 아닌 책 한 권을 다 풀어줘야 하기 때문 때문이었다.

수재들 머리로 해결이 안 되는, 장마다 접어놓고 체크해 놓은 문제가 몇 문제가 아닌, 문제집 한 권 정도였으니 진땀이 나는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 바람에 고3 수험생 이상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 질문을 못 받거나 실력 없는 교사라 평판이 돌면 학교에서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머리 좋은 수재들은 극성을 부린다 할 만큼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일부 선생님들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뜨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내가 그런대로 명문고 학생들한테 별 탈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고학으로 하루 3시간, 4시간 수면에 코피 흘리며 중?고학생들 4파트 지도하는 일과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안 다뤄본 문제집이나 참고서가 없을 정도였으니 학생들을 가르치고 질문 받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선생님들이 학생을 가르치고 공부시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선생님들을 공부하게 만들어 실력 있게 하는 것도 역시 학생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학생들은 선생님의 선생님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도 선생님 같은 학생들 덕분에 학생들 이상으로 공부를 많이 하게 된 준입시생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도 대덕고등학교 근무할 때 대전여고 졸업 30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눠준 졸업생명단 방명록 수첩을 보니 미국 유명 대학교수로 가 있는 베레모의 주인공도 있었고 우리나라 각계 각처에서 동량지재로서 그 존재가치를 뽐내는 '몸빼바지' 주인공들이 많았었다.

지난 얘기지만 대전여고가 화재 사건으로 힘들었을 때에도 몸빼바지의 졸업생 주인공들이 합심일체가 되어 모교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몸을 사리지 않고 힘이 돼 주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몸빼바지들의 모교 사랑의 마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라고 하던 주인공들이 까만 베레모에 몸빼바지로 교복을 입었을 때는 나를 밤잠 못 자고 공부하게 만들더니, 지금은 전국 도처에서, 또는 세계 유명대학이나 주요 기관에서 교수 또는 중견 인물로서 우리 한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서 쉴 새 없이 일하고 있다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반쪽 같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 삶의 의욕을 잃고 갈팡질팡할 때에도 30년이 지난 세월이었지만 ? 발신인 없는 택배 '보약박스를 보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정길순 교사도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하던 몸빼바지의 주인공이었다.

을지병원 장례식장 아내 영결식에도 어디서 듣고 왔는지 "선생님 힘내세요"하며 내 손을 꼭 잡아 주던 송여옥도 대전여고 내 반 반장이었고, 김미령, 윤석숙을 비롯한 이지숙, 양명희, 윤미숙, 양은옥, 설정옥, 정숙원도 까만 베레모에 몸빼바지의 주인공으로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라고 하던 인물들이었다.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라고 하던 몸빼바지에 베레모를 썼던 그 주인공들이 공부만 잘한, 가슴 없는 기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세월이 지난 뒤에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따뜻한 가슴도, 눈물도, 모교애(母校愛)도 투철한 국가관도, 지닌 공부 잘하는 수재들이었다는 것을….

내 어려웠을 때 손을 꼭 잡아주며 "선생님 힘내세요"하던 제자들이 좋은 머리에, 따뜻한 가슴에, 눈물에, 모교애(母校愛)에, 나라 사랑의 마음까지 남달랐으니 내 어찌 몸빼바지의 주인공들을 잊을 수 있으리오!

명문고는 공부를 잘해 명문대 많이 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뒤 늦게 깨달았다.

공부보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사람냄새 물씬 풍기며 사는 졸업생들이 많은 학교가 진정한 명문고라는 사실을 늦으막에 깨닫게 된 셈이다.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 - 베레모를 썼던 몸빼바지를 입었던 여학생 - 이 환시로, 환청으로, 되살아오는 느낌이다.

같은 말인데도 몸빼바지 시절은 그 한 마디가 '진땀 빼는 끔찍한 부담'으로 느껴지더니, 지금은 '식사 같이 할 수 있는 시간 있느냐?'의 의미로 용도 변경을 했으니 말의 위력에 감탄할 뿐이다.

물씬한 사람냄새에 따듯한 가슴까지 느끼게 하는 몸빼바지 제자들에게 느꺼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같은 말인데도 뉘앙스가 다른 말로 쓰는 몸빼바지 주인공들로 바뀌었으니 이것은 세월과 몸빼바지의 어느 쪽의 요술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 시간 좀 있으세요!"했던 베레모와 몸빼바지의 명문고 주인공들이여!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 내음이 몸빼바지에 스민 얼룩이 되어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그 소중한 게 구름 탄 비룡(飛龍)의 용광로 입김이 되어 차가운 세상 오래오래 덥혔으면 좋겠다.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날씨] 이번 주말 흐리고 전국에 강한 비…다음주 소나기 가능성
  2. 대전 RISE 첫 성적표 나왔다… 최대 17억5000만원 차등 지원
  3. 환경단체 "대전시 효과 없는 준설만 거듭"…실효성 있는 재해 방지책 촉구
  4. 국내 마리나 산업·관광 '체류·체험형'으로 체질 개선
  5. 세종충남대병원 '최승원 병원장' 취임… 행정수도 거점 병원 노크
  1. 천안교도소, 구인·구직 만남의 날 행사 개최
  2. 천안어린이꿈누리터, '2026 찾아가는 팝업놀이터' 본격 운영
  3. 천안시티FC, 든든한 파트너 후원사와 한자리에…상생 파트너십 강화
  4. 공군2여단, 호국보훈의 달의 맞아 국가유공자 초청 행사 실시
  5. 장기수 천안시장 당선인, 첫 행보로 민생경제회복 …천안사랑카드 100억원 추가 확대

헤드라인 뉴스


[인터뷰] 박수현 당선인 "도민 의견 담긴 수첩 3권, 3톤처럼 무거워"

[인터뷰] 박수현 당선인 "도민 의견 담긴 수첩 3권, 3톤처럼 무거워"

박수현 충남도지사 당선인은 지방선거 기간, 도민 염원과 바람을 수첩에 빼곡히 적었다. 도민 간담회 등 현장소통을 통해 나온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다 보니 어느새 수첩은 3권으로 늘었다. 박 당선인은 "수첩 3권의 무게가 3톤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수첩에 도민의 엄중한 명령이 담긴 만큼, 압박감과 무게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박 당선인은 도민의 명령을 단순히 무겁게만 느끼는 것이 아닌,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선거용 구호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런 이유에서 통(通)하는 충남 준비위원회 구성도..

許, 재검토 공언했는데…정부 긍정평가 0시축제 존속 기우나
許, 재검토 공언했는데…정부 긍정평가 0시축제 존속 기우나

대전 0시 축제 존속 여부를 둘러싼 지역 사회의 관심이 뜨겁다. 민선 8기 이장우 시장의 대표사업으로 6·3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허태정 당선인이 재검토를 공언했지만, 최근 이 축제를 둘러싸고 부쩍 달라진 기류 때문이다. 정부가 0시 축제의 관광·상권 활성화 등 0시 축제에 대해 일부 긍정평가를 내놓았고 무턱대고 폐지했다가 외교적 마찰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지역사회 안팎에선 0시 축제를 아예 폐지하는 것 보다는 축제 간판을 바꾸거나 축소·개편 쪽으로 방향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18일 지역..

공사판된 대전 도심, 트램 개통 미뤄지나…與野 책임 공방 재점화
공사판된 대전 도심, 트램 개통 미뤄지나…與野 책임 공방 재점화

2028년 말 개통을 목표로 추진되던 대전도시철도 2호선 트램 사업 일정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말 28년 만의 착공으로 본궤도에 진입한 듯 했지만, 토지보상 지연과 시운전 기간 연장, 수소트램 기반시설 문제까지 줄줄이 드러나며 2030년 개통도 장담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이 민선 9기 인수위에서 공식화되며 여야는 또다시 네 탓 공방에 나선 모습이다. 18일 취재에 따르면, 대전시는 최근 대전시장직 인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당초 목표였던 2028년 말 트램 개통이 사실상 어렵다는 취지의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여름철 풍수해 대비 장비 점검 여름철 풍수해 대비 장비 점검

  • 수족구 예방…‘꼼꼼하게 손 씻어요’ 수족구 예방…‘꼼꼼하게 손 씻어요’

  • 접시꽃에 담긴 여름 접시꽃에 담긴 여름

  • 임직원들이 함께 즐기는 월드컵 임직원들이 함께 즐기는 월드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