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순 변호사 심양 유적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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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순 변호사 심양 유적 답사기

고려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중국 심양 등 만주족 유적답사 다녀오다

  • 승인 2021-03-23 16:13
  • 수정 2021-05-03 23:45
  • 한성일 기자한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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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순 법무법인 유앤아이 대표변호사(전 대전사랑시민협의회장, 전 대전시변호사회장, 전 고려대 교우회장)가 고려대 행정대학원 최고위과정에서 2018년 10월 5일부터 10월7일까지 2박3일간 중국 심양, 단동, 수풍댐을 다녀왔다. 이에 정교순 변호사의 심양 유적 답사기를 싣는다.

-편집자 주-



▲정교순 변호사, 중국 심양에 가다



평소 중국 동북아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특히 만주족은 중국 본토를 정복하기 전에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한명기 저 <남한산성>을 감명 깊게 읽은 데다가 영화 남한산성을 감상한 경험도 있어 북한 전문가이자 고려대 북한학과 명교수인 남성욱 원장님의 답사 동행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답사 전에 행정대학원에서 개설한 중국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전문가가 추천한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어 지적 호기심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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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족 유적 현장답사에 임하는 마음 자세>



여진족은 중국인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하여 '진짜 여자와 같다'고 붙여준 족명으로, 여진족 남자들이 여진족으로 불려지는 것에 대해 치욕적으로 분개하였다고 한다.

오랑캐라는 말은 여진족 부족인 우랑카이가 조선국경을 자주 쳐들어온 역사에서 만들어졌다.

여진족은 우리 선조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에 참여한 데다가 통혼도 하였고, 우리 민족과 같은 단두형(머리 앞뒤 길이가 짧음)으로 DNA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진족이 후금을 세울 무렵은 소빙하기로서 거주지인 만주지역이 농경에 적합하지 않음에도 식량 등을 어떻게 조달하여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여진족을 문화 등 다 방면에서 한참 뒤떨어진 야만인으로 경시했는데 이러한 여진족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어떻게 조선을 굴복시킨 후 중국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였다.

처음에 원장님의 동행 제의에 여행의 피로감 등으로 잠시 망설이기도 하였지만 동북아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인해 답사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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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중국 심양 공항으로>



2018. 10. 4. 08:00경 인천공항에서 원장님을 비롯한 원우 26명과 함께 대한항공에 몸을 싣고 서해바다와 요동반도를 거쳐 1시간 50분 만에 심양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중국이 우리나라의 인접국이라 생각했지만 갈 때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1시간 30분, 귀국 시에는 1시간 10분 정도에 도착할 수 있어 이웃 나라임을 실감하였다.

심양 국제공항은 다소 한가한 느낌이었지만 가을 날씨가 청명한 데다가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어 중국 공항 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조금은 완화되었다.

공항 직원은 무표정하면서 수동적이었고, 입국절차가 까다롭고 상당히 지연되어 인천공항의 입국절차가 간편하고 세련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공항에서 만난 조선족 가이드의 첫 인상이 키가 작고 생김새와 복장 등이 영화 속 북한 병사와 같아 실망하였는데 나중에 조선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깊고 재치도 있어 인상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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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고궁, 누르하찌, 홍타이지 묘 견학>



심양은 오래 전부터 북방 유목민족의 주요 거점지이자 현재는 인구 800만의 요녕성 성도로서 만주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동북 3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로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심양은 시대에 따라 후금시대에는 성경(성스러운 수도), 일제 시대에는 봉천, 2차대전 후에는 심양으로 불려지고 있다.

심양 고궁은 만주 벌판 혼하강 옆에 세워져 있어 주변에 바람막이 산이 없는 관계로 바람이 세게 불어 겨울에 엄청나게 춥다고 한다.

심양 고궁은 후금을 세운 누르하찌가 제1궁을 건축하였고, 2대 홍타이지(청태종)가 제2의 궁궐을 건축하여 제대로 된 궁궐 모습을 갖추었으며 후에 건륭제가 조상 제례를 지내면서 추가로 고궁을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궁의 규모는 북경 자금성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고, 조선 경복궁보다 작은 아담한 모습으로 짜임새 있게 궁궐을 배치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고궁 정전 앞에는 돌로 길을 내었고, 길 가운데는 황제가, 바로 옆에는 귀족들이, 맨 바깥에는 하급 관리들이 출입하도록 하여 나라 체제가 갖추어졌음을 엿볼 수 있었다.

심양에는 후금을 세운 누르하찌(후에 청태조로 추존)와 대청제국을 건립한 청태종 홍타이지 묘가 있다.

누르하찌는 명나라 산해관 부근에 축조한 영원성(성주 원숭환)을 공격하던 중 홍이포 공격으로 고전하다가 홍이포의 파편에 맞아 68세에 사망하였다.

누르하찌는 효자고황후와 함께 심양 동쪽 교외 천주산 언덕 위에 있는 福릉에 잠들었고, 복릉은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릉이라고도 하며 묘 상단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조선 태조 이성계의 묘 상단에 억새풀이 나 있는 것과 비슷하였다.

누르하찌는 여진족 영웅인 아골타에 의해 세워진 금나라가 몽골에 의해 멸망한 후 400년 동안 작은 부족 단위로 흩어져 존재감 없이 야만스럽게 생활하던 여진족을 규합하여 후금을 건국함으로써 여진족의 자부심을 한껏 고양하였으나 천하통일의 거대한 야망은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로부터 들여온 최신형 대포로서 몸에 붉은 털이 난 서양 오랑캐가 만든 포라는 의미로 홍이포라고 하였고, 홍타이지는 오랑캐 '夷가 싫어 의복 衣를 사용하여 홍의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심양 고궁에 홍이포가 전시되어 있었으나 우리 일행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관람객이 홍이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려고 하여 우리 일행에게 홍이포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하여 그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후금을 세워 청나라의 기초를 마련한 누르하찌는 명나라 명장인 원숭환 장군을 만나 홍이포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고, 원숭환은 의심이 많고 아둔한 황제 숭정제를 잘못 만나 후금의 반간계에 걸려 살점을 조각 조각 포를 떠내는 책형으로 죽음을 당한 역사를 되새기면서 인생무상을 느꼈다.

의심 많은 숭정제를 보면서 '疑人勿用, 用人勿疑(의심스러운 자는 등용하지 말고, 사람을 등용한 후에는 의심을 하지 마라'는 경구를 되새길 수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을 오랑캐 변방으로 무시하였음에도 조선 집권층은 아둔한 명나라 숭정제를 천명을 받은 유일한 황제로 받들어 모시다가 병자호란을 당하였으니 그 아둔함을 어찌하오리까.

홍타이지는 태조의 8번째 아들로서 무녀독남으로 12살 때 정비인 어머니가 사망하여 가까운 인척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음에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 누르하찌를 도와 전공을 세우면서 장군과 병사들의 신의를 얻어 제2대 황제에 등극할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25살에 후금 황제로 등극하여 재위 17년 동안 중원 정복의 기틀을 만든 후 북경을 정복하기 8개월 전인 52세에 사망하였다.

홍타이지는 몽골족인 효단문황후와 함께 심양 소릉에 잠들었고, 아버지 누르하찌와 같이 묘 상단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홍타이지 묘는 도굴,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내성과 외성을 쌓은 후 병사들이 상주하면서 묘를 지키고 있었고,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은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는 것 같아 삶에 대한 집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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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풍댐 견학>



일제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앞선 기술력을 이용하여 1905년부터 5년간에 걸쳐 함경북도 삭주군 수풍리 소재 압록강에 5개의 발전시설인 수풍댐을 건설한 후 70만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만주와 조선에 전기를 공급함으로써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군은 2차대전 후 만주로 진군한 다음 자국의 열악한 전력사정을 개선하기 위하여 수풍댐 발전시설 5개 중 3개를 해체하여 본국으로 가져가는 치졸한 만행을 저질렀다.

현재는 중국의 양해 하에 수풍댐에서 전기 5만 킬로와트를 생산하여 전량 북한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수풍댐은 아직까지 관광상품 명단에 오르지 않아 비공식적인 관광을 하였고, 중국인들은 수풍댐에서 향어를 양식하여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수풍댐에서 노후 된 고깃배를 이용하여 1시간 30분 정도 관광을 하였고,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의 공동수역이므로 북한군 초소 바로 앞까지 가자 북한 병사들이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여 이에 우리도 손 인사를 하는 등 뜻하지 않은 흐뭇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가이드가 예전에는 북한 병사에게 담배나 생필품을 던져주지 않으면 돌멩이를 던지는 등으로 행패를 부렸다고 하여 약간 긴장을 하였지만 최근의 남북관계 개선 영향 때문인지 그와 같은 불상사는 없었다.

다만 북한 병사들은 복무 연한이 10년이고 후생 복지 상태가 좋지 않아 병사들이 직접 가두리양식장을 운영하여 향어 등 식 재료를 자체 조달한다고 한다.

북한이 수풍댐과 압록강을 관광상품화 한다면 엄청난 국고 수익을 올릴 것임에도 그 가능성이 희박하여 안타까운 맘 금할 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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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박작산성 견학>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 투르크족인 동돌궐이 멸망한 후 발해만에 인접한 요동반도 서쪽에서부터 만주 북서쪽인 심양방면으로 박작산성, 비사성, 건안성, 안시성, 백암성, 요동성, 개모성, 신성으로 이어지는 천리장성을 건축하여 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아울러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동동궐 잔여세력이 건립한 설연타와 외교동맹을 맺을 정도로 외교관계를 중시하였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입하기 위해 동동궐 칸을 방문하여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으나 고구려 사신이 먼저 동동궐 칸을 접견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면서 크게 화를 내었다고도 한다.

수나라 양제는 중원의 위험세력인 고구려를 침범하였으나 요동성을 점령하지 못한 채 퇴각한 후 멸망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수양제에 이어 고구려를 침범하였으나 고구려와 외교동맹을 맺은 투르크족인 설연타의 남하 움직임과 고구려 국민들의 일치단결된 전투력, 안시성주 양만춘을 중심으로 일치된 성민들의 완강한 방어벽을 뚫지 못해 퇴각한 후 '다시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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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작산성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의주와 연해 있었고, 압록강 하류에 위치해 있어 고구려가 압록강을 이용하여 발해만과 산둥반도로 진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압록강을 통하여 수도로 진군하려는 당나라 군대를 막을 수 있는 최초의 보루였다.

만리장성은 춘추 전국시대에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 선비 등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제후국들이 쌓은 성을 후대에 부분적으로 연결하여 방어벽으로 사용하다가 명대에 이르러 오늘날의 장성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서 호북성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감숙성 가욕관에 이르는 21,196km의 거대 산성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여 고구려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엄연히 고구려산성인 박작산성을 호산산성(또는 호산장성)으로 개명한 후 만리장성의 시발점을 호북성의 산해관이 아닌 호산산성으로 연장하여 산성 정문에 '만리장성의 시발지'라고 큰 글씨로 쓴 현판을 내거는 등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해발 130m 정도인 박작산성에 올라보니 압록강 바로 건너편 지근 거리에 의주가 있어 한민족 역사의 비애를 느끼기도 하였다.

의주는 조선 시대에 몽골족이나 만주족이 이곳을 경유하여 조선을 침공할 정도로 변방의 요충지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였고, 조선 3대 상인인 만상, 즉 의주상인은 조선과 청나라의 공, 사무역 특히 조선의 인삼과 청나라의 비단, 서역 물품의 무역을 독점하여 상인 중 으뜸으로 자리 잡았다.

최인호의 '상도'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조선 중기의 최대 거상인 임상옥도 만상이었고, 임상옥은 의주를 거점으로 戒盈盃(계영배, 넘침을 경계하는 잔)와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물은 흐르는 물과 같고, 인간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음)의 상도를 몸소 실현하여 거상으로서 언행일치의 귀중한 족적을 남겼다.

이와 같이 의주는 조선 무역의 중심 거점이었으나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신의주로 넘겨준 후 한적한 시골 농촌 마을로 변하여 세월의 잔인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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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철교 견학>



압록강철교는 일제가 만주 경영을 위한 발판으로 조선 신의주와 만주 단동을 연결하기 위해 중국인과 조선인을 강제적으로 동원하여 세웠다.

6.25 전쟁중에 유엔군은 중국의 조선 참전으로 고전하자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압록강철교를 폭파하였고, 절단된 철교 잔해가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철교를 가까이 보니 철조물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웅장하였고, 그 시절 일본의 선진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압록강철교 건너편 신의주는 고층빌딩이 여러 개 있고, 강변에 놀이시설을 설치하여 중국 단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어 조금은 도시 면모를 느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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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동 평양식당 공연 및 식사>



단동에서 저녁식사는 북한이 운영하는 평양식당에서 북한 예술인들의 공연을 보면서 북한 술, 평양냉면을 맛보기로 하였다.

평양식당은 식당 내에 조그만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우리 팀 외에 조선족으로 보이는 2팀(4명 씩) 밖에 없어 한가로웠다. 식사 전에 한 시간 정도 무대에서 20대 아가씨들이 악기를 이용하여 북한노래와 우리 노래를 불렀다.

아가씨들 일부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일부는 객석을 돌아다니면서 술을 따라 주었으며 무대에서 아리랑을 부르자 동족애를 느낀 나머지 식당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큰소리로 환호하면서 함께 노래를 불렀고, 우리 일행들은 흥에 겨워 예술인들에게 팁을 주기도 하였다.

북한에서 우리 대통령에게 대접했다는 평양주는 품질이 좋았고, 한국사람에게는 1병당 9만 원, 중국사람들에게 3만 원 정도 받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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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들은 공연 아가씨들이 측은하여 팁을 많이 주는 편이나 팁은 아가씨 개인이 갖는 것이 아니고 모두 합하여 당국에서 취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공연 아가씨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였지만 북한에서는 공연팀에 선발되기 위해 상당한 뇌물을 바치고, 상위 10% 이내의 당성이 강하고 미모와 학력이 좋은 아가씨만 선발될 수 있으며 임기는 3년이라고 하였다.

북한지도부가 훌륭한 자질의 아가씨들을 술집 접대부와 같은 일을 시키는 것을 보고 부아가 치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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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동에서 심양까지의 여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경 조선을 친정에 나서 한 달 보름 만에 남한산성 밑에 있는 삼전도에서 조선왕 인조로부터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만주족 신하의 예, 삼궤구고드례라고도 함)의 치욕적인 방법으로 항복을 받았고, 후대 역사에서는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청나라는 전쟁 배상금으로 유목민족에게 꼭 필요한 다량의 곡식, 비단 등을 요구하는 한편 인질로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 왕자, 귀족, 백성 등 포로 30만~50만 명 정도를 심양으로 끌고 갔다.

조선 포로들은 한 겨울에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은 후 통원보, 청석령, 초하구 등 거칠고 음습한 만주벌판을 지나 낯설고 물 설은 심양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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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족인 청나라는 전쟁 포로를 재물로 취급하였으므로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간 후 상당수의 포로들을 노예로 팔았고, 일부 포로는 비싼 속죄금을 받고 돌려주었으며 도망 나온 포로들은 조선 정부를 협박하여 되돌려받은 후 다리 인대를 끊는 등으로 만행을 저질렀다.

속죄금을 내고 돌아온 여인들은 환향년이라고 멸시하였고, 이를 견디다 못한 여인들은 자진하기도 하는 등 조선 여인의 수난사로 전해지기도 한다.

만주족은 조선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장군들이 화약으로 자폭하는가 하면 여인들은 자진을 하였고, 가족들이 최대한의 속죄금을 내고 환향시키려고 하였으나 한족 장군들은 시세가 불리하면 거의 항복하였고, 여자들은 정조 관념이 희박한 데다가 가족들이 속죄금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어 명나라를 조선보다 업신여겼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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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단동을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이용하였지만 병자호란 때 포로들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후 바로 고속도로 곁에 있는 비포장 진흙길인 구도로를 걸어서 심양으로 끌려갔다.

당시 포로들이 한겨울에 혹독한 추위와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한 채 얼마나 진흙탕길에 시달렸는지 도중에 많은 포로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간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봉림대군이 그 당시의 처참함을 시로 읊은 것이 있어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 '청석령 지나거냐, 초하구이 어드메뇨, 바람도 차도 찰샤 구즌 비는 어인일고, 초라한 내 행색 그려내어 님계신데 보내고져' -



미개인이라고 조롱하던 만주족은 시대 흐름을 알고 이에 편승하여 천하를 얻었건만 이념논쟁으로 현실에 아둔한 조선 지도층은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여 불쌍한 백성들만 엄청난 고초를 겪게 하였으니 역사가 반복된다면 어찌 그때 그 지도자들 탓만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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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 오랑캐 여진족이 중원 천하를 얻게 된 이유>



여진족은 한족의 이민족 경시 정책에 따라 세대별로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족명이 변경되어 호칭 되었다.

중국인들은 여진족이라 불렀지만 여진족 스스로는 주르신(한자로 諸申)이라고 불렀다.

여진족은 후금이 몽골에 의해 망한 후 400년 동안 만주 벌판에 흩어져 작은 단위 부족으로 야만인으로 어렵게 살아오다가 명나라 말기에 백두산 주변의 건주여진, 흑룡강성 부근의 해서여진, 연해주 근처의 야인여진으로 통합되어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 부족 간에 심하게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진족은 조선을 상국으로 모시면서 사은 교역을 하는가 하면 시시때때로 변경을 침범하여 재물을 약탈하여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여진족의 발흥을 저지하기 위해 간접통치 방식으로 건주위 등을 설치하여 여진족에게 자치권을 주었고, 명나라에 우호적인 호족들에게 명나라와의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무역중계권을 선별적으로 주어 이이제이 방식으로 여진족을 통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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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찌는 건주여진 추장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때부터 장사꾼으로서 백두산에서 채취한 인삼과 초피(담비가죽)를 명나라 왕족과 귀족들에게 고가로 팔아 엄청난 부를 일궜다.

누르하찌는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 수도 북경을 왕래하면서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체험하면서 국제적인 외교 감각도 키웠다.

누르하찌는 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해야 양병을 할 수 있고, 양병이 밑받침되어야 여진족이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아울러 북방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몽골족과 문화민족인 조선족과 연대해야 여진족이 발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유럽은 남미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은을 채취하거나 일본과의 교역으로 많은 은을 보유하게 되자 은으로 명나라로부터 비단, 도자기, 차 등을 수입함으로써 사치의 극을 이루고 있었다.

명나라는 유럽과의 교역으로 전 세계에 유통되는 은의 44%를 보유하게 되자 일조편법을 공포하여 은을 교환 및 결제수단으로 하여 사실 상 은본위제를 확립하였다.

국제무역으로 부유하게 된 명나라 귀족들은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남아 도는 은을 이용하여 여진족으로부터 보양식품인 인삼, 버섯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의복 제조용 초피(담비가죽), 사치품인 진주 등을 대량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누르하찌는 부국강병을 위한 실용적 현실주의 정책으로 백두산 인삼 판매권을 독점한 후 인삼을 고가로 판매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인한 군수품 판매 등 전쟁특수로 인해 엄청난 양의 은을 보유하게 되었다.

누르하찌는 엄청난 부를 이용하여 팔기군을 조직한 후 명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부국강병을 이룬 후 주변 부족인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을 흡수하였고, 조선을 정벌한 후 몽골족 일부를 정벌하거나 복속하여 중원정복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누르하찌는 통일된 새로운 민족임을 나타내고, 민족의 정체성을 고양하기 위하여 티벳 불교의 만주사리, 즉 문수사리보살을 나타내는 만주를 족명으로 선택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만주족이 누르하찌의 고향인 건주위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문수보살의 가피력을 이용하여 부족의 정체성을 이루려고 고심하였던 흔적에 비추어 만주사리에서 연원하였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홍타이지는 후금을 멸하여 부족의 존망조차 어둡게 만든 철천지 원수인 몽골족과의 혼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외교적으로 몽골의 중원 정벌 경험과 노하우,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할 수 있는 대외환경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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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는 몽골족과 요동한인, 조선족으로 팔기군을 편성하여 민족 통합정책을 추진하였고, 한족인 범문정을 책사로 고용하여 한족의 우수한 정치제도, 문화, 문물을 수입하였다.

여진족은 유목민족들의 전통에 따라 왕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군사 통솔력, 포용력 등을 발휘하여 부족을 위해 혁혁한 전과를 올려 왕의 계승자들을 포섭하거나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으로 후계자가 선정되었다.

이로 인하여 누르하찌의 8번째 왕자이자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어 외척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었던 홍타이지가 뒤를 이어 부국강병과 주변국과의 외교술, 몽골, 조선족 등 주변 민족 포용정책을 적절히 구사하여 100만 정도의 인구로 1억 정도의 명나라를 제압하여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에 따라 상인을 천시하였고, 조선에서 인삼을 많이 채취할 경우 명나라에서 인삼을 조공으로 요구할 것을 염려하여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으로 인삼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조선에서는 1503년 양인인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이 함경도 단천은광에서 세계 최초로 연은분리법을 개발하여 1533년 일본에 전수하였음에도 명으로부터 은을 진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 은 채굴을 금지하였다 .

이로 인해 조선은 국내적으로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비현실적인 이념주의에 도취하여 군사력 증강을 위한 재원인 은을 확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런 의지조차 없었고, 국제적으로는 임진왜란을 당한 후에도 국제정세에 어두워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병자호란이라는 참혹한 대 전란을 겪고 왕은 삼배구고두례라는 치욕스런 국치를 강요당하였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여진족과 우리 민족의 과거사를 반추하여 이에서 얻은 지혜로움으로 우리 민족이 더욱 더 세계사에 우뚝 솟아 자부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롭고 행복한 나라 발전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대해본다.

심양9
<중국 심양 답사 후기>



우리가 나를 알고 남을 알아야 삶의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듯이 앞으로 만주족의 삶의 방식을 다시 알게 됨으로써 우리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선후배 변호사님들께 결코 후회하지 않을 심양 등 만주 역사 기행을 적극 권유하면서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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