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특집] 평화기차는 상상할 때 달릴 수 있다네…대전~파리 1만2천㎞ '칙칙폭폭'

[설특집] 평화기차는 상상할 때 달릴 수 있다네…대전~파리 1만2천㎞ '칙칙폭폭'

대전발 평양 경유 프랑스 파리 도착 기차표를 상상
평안북도 실향민 선우훈씨 "단숨에 고향 달려갈 것"
남북 철도연결 시 관광·물류효과 더불어 평화까지

  • 승인 2022-01-27 18:00
  • 신문게재 2022-01-28 7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분단선(평화통일교육문환센터)
남북분단은 이산가족에게 풀지 못한 한을 남기고 대륙을 자유롭게 오가는 상상력까지 옭아매고 있다. 사진은 민간인통제선의 철책. (사진=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제공)
음력 1월 1일 새해의 시작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문화는 남과 북이 다름없이 오랫동안 지켜온 전통이다. 새해 건강을 기원하는 날에 여전히 우리는 둘로 쪼개진 분단 현실을 안고 있다.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 가족을 못 만난 지 70년을 넘겼을 뿐만 아니라 대륙을 향한 상상력마저 고갈되고 있다. 남북이 철도를 연결하고 유럽으로 향하는 국제철도를 대전역에서 탑승해 출발하고 돌아오는 상상을 펼쳐보자. 상상할 때 도전은 이뤄지고 더 나아가 현실이 될테니 말이다. <편집자주>

▲평양행KTX 얼마요



"아저씨, 평양행 기차표 주세요!"

"엥? 너 지금 뭐라고 했니? 평양행 기차표라고 했니?"



"네, 맞아요. 우리 큰할머니 고향이 평양이거든요."

심문선 작가의 창작동화집 '평양행 기차표'에서 북녘 고향이 그리워 몸져누운 증조할머니를 위해 기차표를 구하러 나온 손녀딸을 그린 동화책의 내용이다. 평양행 기차표가 있어야 우리 할머니가 나을 수 있다며 우는 아이를 위해 역장이 급히 평양행 기차표를 만들어 고사리손에 쥐여 주며 "언제든지 철도가 연결되면 너희 할머니를 첫 번째 손님으로 모실게"라며 위로하는 것으로 동화책은 마무리됐다.

도라산역(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남한의 가장 끝단에 있는 역이자 북한을 찾아가는 가장 첫번째 역이 될 도라산역.  (사진=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제공)
상상을 곁들인 동화속 이야기에서만 아니더라도 북녘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이 현재 4만7000명이고, 이중 82%가 북한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충청권 실향민은 4159명에 달한다. 5년 사이 1351명이 줄어든 수준이다. 대전 신탄진에 거주하는 선우훈(90) 씨도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는 날을 지금까지 기다리는 이산가족 중 한 명이다. 광복 후 이북에서 일어난 탄압과 숙청을 피해 1946년 고향을 떠나 온 가족이 정착할 터전을 마련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으며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이산가족이 됐다. 할머니와 아버지, 작은아버지까지 남한에 먼저 정착 후 이북에 남은 어머니와 여동생, 작은아버지까지 합류한다는 가족계획은 7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고향마을 앞마당을 지나던 기찻길을 따라 걸으며 어머니와 함께 정주역에서 기차로 두 정거장 떨어진 외갓집에 다니던 기억도 손에 닿을 듯 살아 있다. 남한 동두천수용소에 격리되고 경북 풍기에서 가꾸던 화전 그리고 공주에서 가까스로 사진기술을 배워 공주와 신탄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가족을 건사하는 동안에도 고향과 어머니,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은 씻겨지지 않았다.

선우훈 씨는 "기차가 북녘까지 이어진다면 당장에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고향 정주역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대문 앞에서 어머니를 불러보고 싶다"며 "집안 사람들이 대대로 사용할 납골당을 만들었는데 이승을 떠나서도 가족은 헤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맺힌 한을 전했다.

▲속도 내는 남북 철도연결

열차를 타고 대륙으로 가는 철길이 머지않은 미래 다시 뚫린다. 단절된 구간을 잇는 철도 연결사업이 실제 추진되고 있다. 2027년이면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동해를 따라 금강산을 거쳐 두만강까지 갈 수 있는 동해북부선이 완성된다. 현재 단절돼 있는 강릉~고성 제진 구간 110.9㎞를 잇는 작업이 1월 5일 마침내 첫 삽을 떴다. 동해북부선이 마무리되면 물류는 물론 관광까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철길을 우리는 평화와 공존을 위해 사용하고, 한반도가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대륙철도망인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과 만주 횡단철도(TMR), 몽골 횡단철도(TMGR)을 북한을 경유해 만날 수 있는 기반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끊어진 철길을 다시 잇는 사업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4.27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내용이다. 2008년 이후 10여년 만에 남북 정상이 논의 테이블에 앉아 뜻을 모은 것이다. 당시 합의에선 동해북부선뿐 아니라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연결에도 공감했다. 남과 북의 수도를 관통해 남북철도 노선 중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경의선이 완전히 개통될 땐 경제적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증기기관차에서 KTX까지 한국철도120년' 저자 배은선 오류동역장은 코레일이 중국과 러시아, 북한 등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의 찬성을 얻어 2018년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정회원에 가입한 것을 대륙횡단철도를 잇는 첫 단추로 평가했다.

배은선 역장은 "전쟁으로 끊어졌던 경의선은 이미 연결돼 2007년 시험운행을 마쳤고 그 후 1년간 화물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라며 "문제는 경원선과 동해선 연결이고, 연결된 후에는 북한의 열악한 철도 인프라를 대폭 개량해야 한다는 더 큰 숙제가 남아 있다"라고 설명했다.

▲100년 전 오래된 미래

대전역에서 기차에 탑승해 1만2000㎞ 떨어진 독일 베를린 동역 2번 플랫폼에 내리는 일이 상상에서만 가능할까. 우리는 이미 100년 전에 한반도를 종단해 대륙을 건너 유럽까지 기차로 찾아갔다. 대륙국가라는 말이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손기정(1912~2002), 남승룡(1912~2001) 두 조선인 청년은 기차를 이용했다. 부산역에서 경부선을 탑승해 경성(서울)을 지나 중국 단둥(안동)역을 거쳐 하얼빈을 통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소련)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손기정 선생의 증언을 들어보자. 손기정 선생은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서 "우리가 탄 열차는 여객용 기차가 아니라 군 장비 수송용 화물 열차 같은 것이었다. 열차는 때 없이 멈춰 섰다가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달렸다. 어떤 날은 종일 보리밭 사이를 달리다가, 또 어떤 날은 호수를 끼고 한없이 달리기도 했다." 손기정이 한없이 호수를 끼고 달렸다는 곳은 이르쿠츠크 지역의 바이칼호 순환노선이었을 것이고 부산을 출발해 2주 만에 비로소 베를린에 도착했다.

나혜석 작가
부산을 출발해 프랑스와 독일을 다녀온 나혜석 작가와 마라토너 손기정 옹.
이보다 앞서 1927년 6월 19일 부산에서 중국 선양행 기차를 타고 유럽을 방문해 1년 8개월간 세계여행을 감행한 조선인 여성이 있다. 여성운동가이자 화가, 언론인으로도 활동한 나혜석(1896~1948) 작가는 조선여성 첫 세계일주를 기차로 시작했다. 나혜석 작가는 중국 단둥(안동)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한 뒤 국경역인 만주리에서 러시아(소련)로 넘어갔다. 자바이칼스크역을 떠나 치타~이르쿠츠크~모스크바~베를린을 거쳐 7월 19일 오전 파리 북역에 닿았다. 그녀는 기차가 정차하는 곳에 며칠씩 체류하며 보고 느낀 것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는데 '불란서 마을풍경', '만주 봉천 풍경' 등의 유화작품으로 승화했다. 1932년 발행된 대중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글을 통해 "구미만유 1년 8개월간 머리를 짧게 자르고, 서양 옷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연극장에도 갔다.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성 참정권론자도 만나보았다. 실상 조선 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다.

▲상상은 모험을 낳아 현실로

스스로 선을 넘는 것을 좋아한다고 표현한 건축가 오영욱 씨는 2018년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감행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두 손을 맞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 오영욱 작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남역을 거쳐 폴란드 테레스폴역으로 국경을 넘는 기차 객실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대륙횡단 기차여행을 시작해 결국 중국 단둥에서 기차 대신 여객선으로 갈아 타 귀국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여행기를 역순으로 쫓아가면 앞서 손기정 옹과 나혜석 작가가 갔던 철길을 재현할 수 있다.

KTX(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경기도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 전시관에 서울과 평양 그리고 프랑스 파리를 잇는 국제열차 모형이 전시돼 있다.  (사진=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제공)
경부선 상행 KTX가 정차하는 대전역 3번 트랙에서 탑승해 서울역을 거쳐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는다면 개성역에 먼저 도착할 것이다. 3분간 정차 후 출발해 멀리 삼각형 모양의 101층 류경호텔이 보인다면 평양역에 도착한 것이다. 대전역에서 300㎞쯤 달려온 것이다. 오영욱 작가는 그의 책에서 "평양은 그 자체로도 아이러니의 박물관이면서 독보적이라 세계에 당당히 자랑할 만한 유산이다"고 설명했다. 몇 시간을 더 달려 신의주청년역에서 간단한 입국심사를 거친 뒤 중국 기관차로 교체한 뒤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순간 1시간 시차가 발생하고 중국 대륙에 입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1100㎞를 달려 베이징역에 도착한 후 기차를 환승후 몽골 울란바토르역을 넘어 러시아 나우슈키역을 경유해 벨라루스, 폴란드, 독일 그리고 프랑스까지 이어진다. 국가간 궤도 간격이 달라 간격 1435㎜ 표준계를 쓰는 남한과 중국에서 광궤(간격 1520㎜)를 쓰는 러시아에 진입할 때 신발을 바꿔신듯 기차의 바퀴를 바꾸는 것도 이색적인 볼거리다. 대전역을 출발해 7개국을 거쳐 14일째 되는 때 파리에 닿을 수 있다.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사무처장은 "분단은 철도와 국토의 단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까지 단절시켜 대전역에서 국제 열차를 탑승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섬나라보다도 열악한 환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분단극복이 절실하며, 남북철도를 연결해 대륙으로 뻗어 나가게 된다면 한반도 평화와 함께 우리의 상상력도 무궁무진하게 뻗어 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임병안·임효인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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