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영어와 노는 아이들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영어와 노는 아이들

청양교육지원청 이미선 장학사

  • 승인 2022-09-22 11:22
  • 신문게재 2022-09-23 18면
  • 김성현 기자김성현 기자
이미선
청양교육지원청 이미선 장학사
"선생님 오늘 단어는 무엇인가요?"

출근해서 내가 매일 하는 일은 칠판에 영어와 한글을 섞어 적는 일이다. 아이들은 영어단어를 읽고 한글을 영어로 바꾼 후 알파벳을 배열해 단어를 쓴다. 가령, Baby를 써 놓으면 '베이비'라 읽고 '아기'라고 쓴다. 또 '손'을 읽고 'Hand'라고 알파벳을 배열해 단어를 쓴다.

4학년 교실에서 보기 힘든 이 기이한 광경은 담임을 시작한 후 5월부터 시작됐다. 첫 영어시간에 아이들에게 알파벳 대소문자를 써보라고 하였다. 놀랍게도 9명 중 겨우 두 명만이 순서가 다소 뒤바뀐 채 그런대로 썼고, 나머지 아이들은 대문자 'G'벽을 넘지 못했고, 소문자는 더 처참했다. 원어민교사가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지원을 했지만 아이들에게 영어는 외계어였고, 영어수업은 한없이 따분하고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영포자'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이미 아이들이 하고 있는 '거꾸로 교실'과 함께 영어 파닉스를 가르치기로 했다. 파닉스의 기본원리를 알려주고 단자음과 단모음을 조합하여 만든 단어를 읽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철저하게 파닉스 기본에 맞는 단어만을 선택해 가르쳤다. 이후에 기본에서 벗어난 단어가 나오면 새삼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가를 비교하며 파닉스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아이들은 손수 만든 알파벳 조각을 조합해 내가 말하는 영어단어를 만든 후 읽고 쓰는 활동을 했다. 이른바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 알았던 영어가 아이들에게 즐거운 놀잇거리가 되면서 서서히 영어문맹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늘 새로운 단어를 제시해 달라고 졸랐고 수준이 어려울수록 배움의 희열은 더 크게 보였다. 파닉스 원리에 따라 'Telephone'을 'Telefon'으로 만들지언정 영어는 더 이상 어렵고 지루한 공부가 아니었다.

나는 가끔 '거꾸로 교실'에 선생님이나 학부모를 초대해 영어인터뷰를 하였다. 이른바 '블라인드 손님'이 있는 날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기다리는 수업이었다. 거꾸로 교실에 참여한 분을 알아맞히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영어를 최대한 동원했고, 때로는 질문지를 준비해 오기도 했다. '너무 어려우니 힌트를 달라.'는 엄살을 부리면서도 아이들은 열광했다. 아이들은 스스로가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원어민교사와 짧은 회화를 시도하는 등 열정 넘치는 아이들로 변했다.

나는 아이들을 5학년까지 가르쳤다. 6학년이 되어도 아이들은 여전히 우리 반을 드나들었고, 방과 후에는 교실에 들러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떼로 와서 담임도 아닌 나에게 영어책 읽기 동아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미리 만들었다는 '영어꿀꺽 동아리' 이름과 영어를 꿀꺽 삼켜 잘 소화하자는 거창한 의미도 설명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세 번 방과 후에 영어책을 읽었다. 돌아가며 한 줄씩 읽고 뜻을 해석해 보기도 했다. 욕심많은 아이들은 구글번역기로 읽을 내용을 엉뚱하게 해석해 오기도 했다. 동아리 시간에는 아이들의 관심거리, 고민, 학교생활 등 영어책 읽기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가족같은 친밀함은 지금도 미소짓게 한다. 졸업식 날 아이들이 준 엽서에 '선생님과 함께했던 영어공부가 학교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어요.'라고 쓴 글을 보고 눈시울을 글썽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미래의 보물이다. 그 보물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쳐야 하는가는 교사가 된 순간부터 가져야 할 소명일지도 모른다. 가르친다는 것은 멋지고 아름다운 일임과 동시에 인간이 성숙해가는 또 하나의 길이 아닌가 싶다. /청양교육지원청 이미선 장학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 행정수도법 논의 물꼬 트나… 28일 소위 유력
  2. 대전 3대 하천 가을 꽃단지 ‘인기’
  3. 기후부, 전력망 주민참여 확대 개정안 입법예고… 대전서 집회 지속
  4. [2026 국감] 국립대 통합 성패 쟁점…충남대·공주대 재추진, 충북대·교통대는 무산
  5. 대전 도안2-13지구 도시개발(가칭) 추진… 유성구, 주민 공람 진행
  1. '6년 공회전' 대전역세권 개발의 민낯… 500억 손실에도 한화 철수
  2. STN 스포츠, 레쥬와 골프 예능 '골당 TV' 11월 첫 방송
  3. 대전역세권 사업 2027년 재공모 들어간다… 환승센터 등 나눠 공공투자 전환 여지도
  4. 정규직-비정규직, 갈수록 벌어지는 임금 격차
  5. 구민 등진 국민의힘…대덕구의회 원구성 또 불발

헤드라인 뉴스


대전의료원 어떻게 지을까… 시공사 공고 앞 주민·의료계 의견 듣는다

대전의료원 어떻게 지을까… 시공사 공고 앞 주민·의료계 의견 듣는다

지역 최대 숙원 사업 중 하나인 대전의료원 건립과 관련 대전시가 구체적인 기능과 설계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논의에 본격 시동을 건다. 시공사 선정 절차를 앞두고 주민 의견청취와 전문가 포럼을 잇달아 열고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에 대비한 공론화 작업에 나서는 것이다. 22일 대전시에 따르면 시는 오는 11월 중 대전의료원 시공사 선정을 위한 기술제안방식 공고를 추진할 계획이다. 기술제안방식은 참여 업체가 의료원의 공간 구성과 시공계획 등을 직접 제안하고 이를 평가해 시공사를 선정하는 절차다. 단순히 정해진 설계에 따라 업체를 선정하는..

대전 금연구역 5만여 곳에 지도원 35명… 단속 한계에 정책 실효성 의문
대전 금연구역 5만여 곳에 지도원 35명… 단속 한계에 정책 실효성 의문

대전시가 간접흡연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금연지도원을 배치하고 금연구역 내 흡연 과태료를 인상했지만 일부 자치구에서는 수년째 적발 실적이 없어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지역 내 금연구역은 5만여 곳에 달하는 반면, 현장 점검과 계도를 담당하는 금연지도원은 35명에 그쳐 관리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21일 대전시에 따르면 지역 내 금연구역은 5만 580곳이다. 자치구별로는 서구가 1만 4881곳으로 가장 많고, 유성구 1만 4721곳, 중구 7327곳, 대덕구 6898곳, 동구 6749곳이다. 시청 소관 금연구역은 4곳이다...

청와대·국회·부처 이전 감안한 청주공항 시설 확충 필요
청와대·국회·부처 이전 감안한 청주공항 시설 확충 필요

대통령 세종집무실과 국회, 정부 부처 이전 등 '행정수도 완성' 계획에 따라 행정수도 관문인 청주국제공항의 시설 확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미 공항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넘을 정도로 이용객이 늘어난 데다, 정상외교와 국제회의, 공무출장 등까지 수요가 급증할 수밖에 없는 만큼 민간 전용 활주로 신설과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조국혁신당 황운하 의원(비례)이 22일 제공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청주공항의 국제선 여객터미널은 연간 15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2025년 실제 국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6 대전 장애인 취·창업박람회 성료 2026 대전 장애인 취·창업박람회 성료

  • 대전 3대 하천 가을 꽃단지 ‘인기’ 대전 3대 하천 가을 꽃단지 ‘인기’

  • 대전경찰청, 제81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개최 대전경찰청, 제81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개최

  •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건설폐기물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건설폐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