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 자라서 머지않아 달음박질까지 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곤 툭하면 "외할아버지 댁에 가고 싶어요!"까지 외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지금과 달리 과거엔 자녀를 많이 낳았다.
조부와 조모의 보살핌으로 쑥쑥 성장했다. 지금으로선 어림도 없는 얘기겠지만 그때는 아이가 있는 방에서도 어르신들이 담배를 즐겨 태웠다. 할머니가 입에서 잘게 부순 밥알과 기타의 과일 따위까지 아이에게 먹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한 풍경들이 이제는 전설로 전해질 따름이다. 하여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내 자손은 귀하다. 한데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라는 뜻을 지닌 사자성어에 거자일소(去者日疎)라는 게 있다.
이 말의 본래 취지는 죽은 사람에 대한 생각은 날이 갈수록 잊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점점 사이가 멀어짐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인데 가족도 자주 만나야 정이 드는 법이다.
심리학을 전공한 딸답게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남다른 행보를 보일 것으로 믿는다. 내가 바라는 외손녀에 대한 딸의 자녀교육 '범주'는 평소 집안 어르신을 자주 찾아뵙도록 했으면 하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늙으면 더 외로워진다. 이럴 때 가장 약이 되고 힘이 되는 건 단연 '내 새끼들'이다. 외손녀의 걸음마에 이어 화상통화로 친손자의 모습까지 일견(一見)하자면 계속하여 건강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진시황도 피해가지 못 했거늘 어찌... 하여간 나는 사실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삶에 대한 애착과 의욕이 없었다. 당시는 아들과 딸이 모두 대학에 가기 전이었다.
그 즈음, 비정규직과 박봉의 힘든 삶은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빈곤에 찌들다보면 때론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투신하거나 강물에 뛰어들어 죽고만 싶었다. 그러다가 딸이 서울대 합격증을 건네주면서부터 비로소 '살고자 하는 삶'으로 치환되었다.
외손녀와 친손자의 모습을 보자면 나도 녀석들처럼 어렸을 적엔 어땠을까… 라는 기시감(旣視感)이 밀물로 다가온다. '울엄마도 날 낳고는 그런 느낌에 젖었겠지? 그런데 왜!' 나를 버리고 집을 나갔을까...
어머니의 가출 시기는 내가 생후 첫 돌을 맞기도 전이었으니까 그야말로 '핏덩어리'였다. 길을 가노라면 전도하는 교인을 자주 본다. 그는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너무도 일찍 그 '지옥'을 경험했다. 그것도 유년기에서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 100년 시대 조국의 기생충은 누구인가]의 홍찬선 저자는 그의 책에서 "난파선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도만 해서는 안 되고, 육지를 향해 끊임없이 노를 저어야 한다"고 했다.
옳은 소리다. 일상적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노를 젓는 열심과 성실이 담보되지 않으면 가뜩이나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낙오될 수도 있다.
저자는 아울러 자녀를 이른바 '스카이'(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영문표기 첫 자로 만든 말) 대학에 보내려면 필요한 필수항목으로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본인의 체력을 꼽았다.
이 외에도 "할머니의 운전 실력과 동생과 형, 언니의 희생이 양념처럼 뒤따른다."고 적었다. 여기서 나에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딸은 출신고교에서 유일무이 서울대를 갔다.
그것도 장학생으로. 조금 늦긴 했지만 아들 역시 작년에 서울대 대학원을 수료(修了)했다. 이 같은 '쾌거'에 사돈어르신께서 더 좋아하셨다. 딸은 서울대 대학원 졸업 때까지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장학금을 받았다.
재학 당시 매달 생활비를 보내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가난을 탓하지 않고 너무나 잘 자라준 아이들과 '약속'한 때문이다.
'그동안 허룽허룽 살아서 미안했다. 앞으론 정말 열심히 잘 살겠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는 9년 전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작년 말에 정년(1959년생이므로)이었지만 우수사원으로 꼽혀 촉탁직으로 계속 근무하고 있다. 딸은 나를 살려낸 은인이기도 했다.
홍경석 / 수필가 & '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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