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자랑스런 충남인' 폠훼가 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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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랑스런 충남인' 폠훼가 웬말?

임준수/전 중앙일보편집국장 대리

  • 승인 2025-05-14 11:22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런데 다마(多魔)가 아니고 소마(少魔)에도 못미치는 1마가 호사(好事)의 판을 깨는 불합리가 대명천지(大明天地)라는 현대 사회에서도 엄존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호사'란 국내 최고의 명문 가든으로 꼽히는 천리포수목원을 일으킨 귀화미국인 고 민병갈의 수목원 조성 기록물이 국가등록문화유산(옛 문화재) 후보에 오른 것이고, '1마'란 이같은 호사에 뒷다리를 걸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심술꾼을 지칭해서 붙인 말이다.

그 심술은 소수에도 못드는 1인의 단발이라서 효력을 잃고 일과성으로 끝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문제의 민병갈 기록물을 면밀히 검토하여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이 타당하다고 판단한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이 '지정 예고'까지 했으나 한 개인의 무책임한 반론에 직면하여 공시 두 달이 넘도록 결론은 못내고 있다. 관계 규정에 따르면 국가등록문화유산은 1개월의 예고기간을 거쳐 이론이 없으면 자동으로 원안 처리된다. 그런데 한 아마추어의 반론에 걸려 다시 180일간의 심사과정을 밟아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다 알다시피 천리포수목원은 서해안의 보석으로 꼽히는 충남의 보배다. 그 설립자는 민병갈(Carl Ferris Miller 1921~2002)은 1945년 8.15해방 직후 한국에 진주한 미군의 해군장교로서 한국의 자연에 반하여 57년간 이 땅에서 머물며 필생의 사업으로 천리포수목원을 일구고 그 모두를 제2 조국에 선물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한국 귀화 후 '자랑스런 충남인'상을 받은 그가 수목원을 조성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그 과정을 꼼꼼히 적은 기록물이 폄훼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국가유산청은 국내 사립수목원의 원조인 천리포수목원의 탄생 과정이 담긴 기록물의 보존적 가치를 인정하고 지난 3월 18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한다고 예고했다. 관계 전문가를 동원하여 1년 가까이 면밀하게 조사 검토한 결과였다. 사전 예고는 1개월간 여론 수렴을 규정한 관계 법규에 따른 조치였다. 그런데 공시가 나간지 며칠도 안돼서 한 유식자(?)가 이 기록물의 주인공(민병갈)을 '국내 식물 유전자원의 해외 유출범'으로 몰아 국가유산 지정을 철회하라는 주장을 해당기관의 홈페이지에 올려 문제가 불거졌다. 급기야 주무당국인 국가유산청은 유예기간을 늘리고 천리포수목원은 소명자료 준비에 바빠졌다.

이의를 제기한 근거가 좀 황당하다. 1960∼70년대 한반도의 많은 토종종자들을 미군 GMC에 실어 외국에 빼돌렸다느니…. 60년대는 천리포수목원이 있지도 않을 때였고, 편지봉투 만한 씨앗 봉지를 대형 트럭에 실어 날랐다? 논리를 떠나서 서양인 남자로서는 최초로 한국에 귀화한 민병갈의 한국 사랑과 인품으로 볼 때 상상할 수 없는 날조다. 발설자의 이같은 주장은 30여년전 KBS가 방영한 고발 다큐를 근거로 한 것인데, 당시 이 특집 프로그램은 방영 후 천리포수목원의 항의를 받아들여 방송사 측이 사과성 유감을 나타낸 과장 보도였다.

문제의 고발 다큐는 1997년에 방연된 '종의 전쟁'이라는 기획 프로그램이다. KBS는 이 특집방송에서 민병갈 천리포수목원장이 인덱스 세미넘(Index Seminum)이라는 국가간 종자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나라 토종 식물의 씨앗을 외국에 유출했다고 주장하고 이어 미국 국립수목원의 식물탐사단을 도와 5년동안 한반도 자생식물들을 샅샅이 뒤지도록 안내했다고 문제 삼았다.

다큐가 지적한 민 원장의 두 가지 행적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익 손상이나 유전자원 유출은 아니었다. 호혜 원칙에 따라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은 받은 것 뿐이다. 그는 한국의 토종식물이 세계 식물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랐고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국내에서 볼 수없는 다른 나라의 식물들을 더 많이 기르고 관상할 수 있기를 바랐다. 식물 내셔날리즘, 즉 식물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믿었다.

국내 식물원 중 야생화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한택식물원의 이택주 사장은 일찍부터 식물주권 반대론을 폈다. 식물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가능하면 외국 식물을 많이 들여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토종식물의 문호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 이 사장으로부터 KBS 고발 다큐와 관련하여 어이없는 설명을 들었다. 잘 아는 담당 PD에게 왜 그런 기획을 했느냐 물었더니 "시청자들은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궁색한 답변을 하더라는 것이다.

문제의 특집 방송을 시청한 민원장은 '우물안 개구리' 같은 발상이라며 자신이 내보낸 국내식물 씨앗의 몇 배를 외국에서 기증받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당시 그는 아무리 희귀한 토종식물이라도 독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그 한 사례로 한국의 희귀종 미선나무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큐(Kew)식물원에서 보호 연구되고 있음을 밝혔다. 천리포수목원의 소명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개가시나무는 영국 힐리어(Hillier) 재배소에서 보전되어 고향 땅 한국에서 다시 자랄 수 있게 되었다.

원로식물학자 김용식 교수는 민병갈원장이 국내 원예식물계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며 그 대표적인 업적은 재배종(Cultiva)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그 통로는 바로 KBS 다큐가 문제삼은 인덱스세미넘이다. 16세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대학-식물기관간에 잉여 종자를 공유하자는 취지로 출발했다. 1978년 민원장이 국내 최초로 가입한 이 범세계적인 네트워크는 국립수목원, 서울대학 관악수목원, 제주 여미지 식물원 등이 잇달아 참여하여 이제는 국내 식물계서도 보편화된 상태다.

사실을 왜곡한 KBS 다큐는 28년전의 과거사라고 불문에 붙인다 치더라고 그 해묵은 왜곡 보도를 근거로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서 평지풍파를 일으킨 유식자는 누구인가. 알고 보니 그는 식물학과는 거리가 먼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사학도였다. 식자우환이란 옛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일 것이다.

우리사회는 언제부터인가 목소리가 커야 말 발이 서는 이상한 풍조가 횡행하고 있다. 논리적 주장보다 상식론이 앞서고 상식보다는 무턱댄 직관적 판단이 힘을 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치에 어긋나는 주장이 다중의 힘으로 떼를 써서 이기는 경우도 같은 맥락이다.

말이 길어졌으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시 30여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정부(문화공보부)가 한국 미술 500년전을 기획하여 뉴욕등 세계대도시 순회 전시를 할 때였다. 파리 전시를 앞두고 당시 주불 한국대사관의 조영호공보관이 프랑스 권위지 '르 몽드'를 찾아가 전시 소개를 간절히 요청했다. 그런데 신문사측의 답인 즉 "동양미술 전공 기자가 장기휴가 중이라서 사실보도 이상의 해설 기사는 내기 어렵다"며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는 것이다. 이는 전문성과 책임이 강조되는 진정한 언론의 자세라 할 것이다.

지금은 프로의 시대다. 전문성이 결여된 아마추어의 어설픈 논리와 섣부른 주장이 득세해서는 진실이 설 땅이 없다. 구시대의 유산으로 끝나야 할 그레샴 법칙이 환생하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시대가 재판되어서는 곤란하다. 다행히 민병갈 기록물의 경우는 다른 반대론자가 나타나지 않아 극소수 이견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만리타국에 꿈의 자연동산을 세워 세계 랭킹에 올려놓기까지 그 고난과 신산의 과정이 점철된 한 이방인의 기록이 그가 선택한 제2조국의 국가유산으로 남아 길이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충남인뿐이겠는가.

임준수/전 중앙일보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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