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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석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기술응용센터 책임연구원 |
그렇다면 한국적 의학인 한의학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리 밝지 않다. 한국에서조차 한의학은 여전히 낡은 의학으로 치부되거나 과학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연구비를 확보하려면 인공지능, 첨단치료 같은 키워드가 붙어야 하며, 전통 한약이나 천연물 연구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의학의 본질을 다시 살펴보면, 오히려 현대 의학이 지향하는 맞춤형 정밀의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한의학은 원래 개인 맞춤의학을 근간으로 한다. 같은 병명이라도 환자의 체질과 상태에 따라 다른 처방을 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현대 의학이 지향하는 '정밀의학(precision medicine)'의 철학과 일치한다. 최근에는 유전체(DNA)와 전사체(RNA) 분석 비용이 크게 낮아져, 개인별 유전적 특징을 고려한 맞춤 치료가 가능해지고 있다. 암 치료만 보아도, 환자마다 보유한 유전자 돌연변이나 발현 양상이 달라 치료제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예컨대 폐암 환자에게 암세포 성장을 부추기는 특정 유전자 변화(EGFR 변이)가 있으면 '타그리소'를 선택하고, 종양이 면역세포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내보내는 단백질(PD-L1)의 발현율이 높으면 '키트루다'를 선택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실제 환자의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특정 지표 하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보다 정교하고 종합적인 분석이 필요한 이유다.
이 지점에서 AI의 역할이 중요하다. 만약 수만 명 암 환자의 유전체·전사체 데이터와 치료 반응률이 축적돼 있다면, AI는 새로운 환자의 유전체를 분석해 기존 데이터와 비교·학습함으로써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다. 즉 환자와 가장 유사한 유전체 패턴을 가진 사례를 찾아내고, 그 사례에서 효과가 컸던 치료제를 추천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치료율을 높이고 불필요한 시도와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임상 데이터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 현재 일부 한방병원과 연구기관이 협력해 임상연구를 진행 중이지만, 아직 체계적인 유전체 데이터까지 확보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21세기를 "데이터의 시대, 데이터는 곧 석유"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질의 환자 데이터가 모여야 AI가 제대로 학습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의학이 맞춤·정밀의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앞으로 한의학이 가야 할 길은 단순한 전통 보존이 아니라,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혁신적 진화다. 전통 한약재와 치료법에 대한 방대한 임상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이를 AI 분석과 접목한다면, 한의학은 단순한 대체의학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정밀의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미 K-POP, 김밥, 한국 드라마가 세계인의 일상에 스며든 것처럼, 언젠가 K-Medicine이 세계 환자들의 치료 옵션으로 당당히 자리 잡을 날을 기대해 본다.
정환석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기술응용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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