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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태 교수 |
그동안 한국 공교육은 공부의 질보다 양을 강조해 왔다. 최근 연세대 김재엽 교수 연구팀이 전국 중·고교생 1000명을 상대로 진행한 '2024 청소년 생활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절반이 수면 문제를 겪고 있었고, 주중 수면시간은 5.8시간에 불과했다. 이는 OECD 국가들 중 최하위 수준이다. 여전히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4당 5락 신화가 버젓이 통용된다. 학교에서 학원 숙제를 하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새벽에 집에 돌아와 겨우 4~5시간 잠을 잔 뒤 학교에 등교하는 생활은 청소년들의 체력과 정신을 소모시키지만 학습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대표적인 가짜 공부다.
역사는 양을 앞세운 정책이 얼마나 큰 실패로 귀결되는지 이미 보여 주었다. 1958년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심경밀식'이라는 벼농사 기법으로 생산량을 늘리려고 했지만,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목표는 오히려 흉작과 기근을 불러왔다. 그 결과 약 2500만 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최근 우리 사회가 겪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논란 역시 근거 없는 양적 확대가 어떤 위험을 낳을 수 있는지 경고한다. 비수도권 지역의 의료인력 부족을 타개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교육의 질을 담보하지 못한 채 단기간 정원만을 대폭 늘린 일방적 결정은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며 의대 교실 내 학습 환경 악화와 부실 교육을 초래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AI가 불러온 초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양보다 질이 핵심이다. 그럼에도 역대 정부가 수십 년간 '입시지옥 해소'를 외쳤음에도 변화를 이루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시험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 서열 체계와 이를 둘러싼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가 뿌리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평가가 권력의 도구가 될 때 사회는 병들고, 결국 피해는 미래 세대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제는 가짜 공부를 양산하는 입시 중심 교육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단순한 시험 방식 개편을 넘어, 학습의 목표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얼마나 의미 있게'로 전환해야 한다. 물량 공세식 양적 수업을 줄이고,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질적 학습으로 나아가야 한다.
해법의 실마리는 이미 제시돼 있다. 미국의 교육심리학자인 벤자민 블룸은 '2 시그마 문제' 연구에서 개인 튜터링이 집단 수업보다 두 표준편차나 높은 학습 효과를 낸다고 밝혔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이 이제는 AI 에듀테크를 통해 구현이 가능해졌다. AI를 활용한 맞춤형 피드백과 실시간 학습 진단은 기존의 집합식 교육이 만들어 낸 비효율적 가짜 공부를 대체할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물론 AI 에튜테크가 만능열쇠는 아니다. AI 시대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AI 기술을 비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과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적응력과 회복력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와 타인의 요구를 읽어내는 공감 능력이 함께 길러져야 한다. AI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료와 피드백에 과잉 의존하고 소비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를 통해 스스로 학습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자기주도력이 필요하다.
이제 정부와 학교, 학부모 모두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정부는 양적 지표 중심의 교육 정책을 과감히 버리고, AI와 인간 교사가 협력해 학습자의 질적 성장을 지원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학교는 교사 주도의 일방향 수업을 줄이고 AI를 활용한 개별 피드백과 프로젝트 학습을 확대해야 한다. 학부모 또한 '몇 시간 공부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질문으로 무엇을 배우고 어떤 변화를 이루었느냐'를 묻는 문화로 전환해야 한다.
AI는 인간의 창의성과 사고력을 대체할 수 없겠지만, 개인 맞춤형 학습을 제공하여 진짜 공부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준다. 가짜 공부를 걷어내고 진짜 공부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AI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자 대한민국 교육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혁신이다./김정태 배재대학교 글로벌자율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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