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서울대 10개 만들기, 필요한 것은 '연구비의 크기'가 아니라 '연구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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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서울대 10개 만들기, 필요한 것은 '연구비의 크기'가 아니라 '연구의 시간

임현섭/충남대학교 응용생물학과 교수·국가교육위원회 고등교육특별위원회 위원

  • 승인 2026-01-19 11:23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분명 의미 있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거점국립대학을 중심으로 지역의 연구·교육 역량을 끌어올리겠다는 취지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정부 역시 고등교육과 연구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논의와 실행 과정을 지켜보면 아쉬움이 크다. 지금의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근본적인 연구환경의 변화보다는, 기존에 반복되어 온 줄 세우기식 국가 연구과제 배분 구조를 확대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제시되는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주요 사업은 교육 연구환경에 대한 제도적 개선이 아닌 교육부에서는 '얼마의 연구비를 배정할 것인가', 거점대학에서는 '어떤 대형 과제를 유치할 것인가'에 머물러 있다. 이는 그동안 한국 대학이 반복해 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비 규모는 커질 수 있으나, 연구 환경은 바뀌지 않는다. 단기 성과 중심, 과제 공모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연구, 유행과 정책 키워드에 따라 연구 주제가 이동하는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서울대가 하나든 열 개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은 연구비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한국 대학의 가장 큰 한계는 교수 개인이 임용 시점부터 퇴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질문을 붙잡고 연구할 수 없는 구조에 있다. 연구자는 연구를 하기 위해 연구비를 쫓아다니고, 연구 주제는 학문적 질문이 아니라 공모 지침서에 의해 결정된다. 이 환경에서 장기 축적형 연구, 실패를 전제로 한 도전적 연구, 당장 쓸모없어 보이지만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초 연구는 살아남기 어렵다.

이 문제는 특히 신임 교수에게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필자의 대학에서도 교수 임용 이후 연구를 정착시킬 만한 지원금은 선진국 대학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수준이며, 이는 다른 거점국립대학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갓 임용된 교수는 자신의 연구 정체성을 유지하기는커녕, 연구를 시작조차 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인다. 연구실을 꾸리고, 학생을 키우며, 장기적인 질문을 설계하기도 전에 곧바로 경쟁적 과제 시장으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연구자의 생애'는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해 왔다.

노벨상을 많이 배출한 대학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은 노벨상을 목표로 연구하지 않았다. 대신 연구자의 생애를 보호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한 연구자가 수십 년간 같은 질문을 붙잡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대학이 책임졌다. 연구비는 연구의 조건이 아니라, 연구를 확장하는 수단이었다. 이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결정적인 격차로 나타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이번에도 단기적 연구비 배분 사업으로 귀결된다면, 거점국립대학은 또다시 '성과 경쟁의 하청 구조'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수도권 대학을 따라잡기 위해 더 많은 과제를 따내야 하고, 더 큰 연구비를 확보해야 하며, 더 빠른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구조다. 이는 지역대학 교수들의 연구 만족도를 높이지도 못하고, 지역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지도 못한다.

이번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반드시 방향을 바꿔야 한다. 핵심은 연구비의 크기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생애를 지탱하는 제도적 뒷받침을 만드는 것이다. 거점국립대학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교수 개인의 장기 연구 정체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임용 직후부터 안정적으로 연구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 연구비는 서울대 10개 대학의 기본 재정 구조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경쟁으로 따내는 과제가 아니라, 대학이 연구자를 채용한 순간부터 함께 책임져야 할 공공적 투자다.

반면, 도전적·확장적 연구, 국가 전략과 직결된 연구는 기존처럼 국가 차원의 경쟁적 연구과제로 운영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영역을 명확히 분리하는 것이다. 기반 연구비는 연구의 '존재 조건'이고, 경쟁 연구비는 연구의 '확장 수단'이어야 한다. 경쟁 과제를 따지 못했다고 해서 연구가 중단되는 구조에서는 결코 지속 가능한 연구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없다.

이러한 연구 지원 체계는 학부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와 결합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연구 정체성을 가진 교수가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대학은, 학부 교육에서도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연구자의 생애가 보호되는 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단기 성과가 아닌, 학문의 축적과 질문의 힘을 배우게 된다.

이 구조가 만들어질 때, 거점국립대학은 더 이상 '수도권 대학을 대체하는 2순위 선택지'가 아니다. 굳이 수도권으로 가지 않아도 세계적 수준의 교육과 연구를 받을 수 있는 대학, 지역에서 가장 가고 싶은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는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지만, 이번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통해 시작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오기 어려운 기회일지도 모른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단기적 성과를 만드는 정책이 아니라, 대학의 본질적인 교육·연구 환경을 재설계하는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연구비의 크기를 나열하는 계획이 아니라, 연구자의 생애와 학부 교육을 함께 설계하는 지속가능한 제도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또다시 몇 년 뒤 "왜 연구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연구비가 아니라, 더 긴 시간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그 시간을 허락하는 정책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임현섭/충남대학교 응용생물학과 교수·국가교육위원회 고등교육특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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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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