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웰다잉, 관계를 남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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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웰다잉, 관계를 남기는 삶

홍인숙 대전웰다잉연구소 소장

  • 승인 2026-06-29 16:44
  • 신문게재 2026-06-30 19면
  • 방원기 기자방원기 기자
풍경소리 홍인숙 대전웰다잉연구소장
홍인숙 대전웰다잉연구소 소장.
신록이 푸르고 유난히 매미가 울어 젖히는 계절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늦은 배움의 길에서 학연으로 맺어진 멋진 언니이다. 노래도 잘 부르고 그림에 조예가 깊은 데다가 자기표현이 확실했던 아름다운 여인, 아쉽게도 너무 일찍 떠나버린 사람이다. 언니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수주 전에 보내온 문자 메시지가 내게는 오래오래 잊히질 않는다. 한하운 시인이 그토록 갈구했던 생의 희구가 자신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마지막에 섰노라고, 자신도 마음에 담긴 것들을 글로 써보고 싶었노라고, 그렇게 단 한 번 마음을 내놓고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난 언니는 해마다 여름이면 무성한 가로수 잎새를 흔들며 내게로 온다.

생전의 언니는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가는 합창단 자원봉사자로 열심히 활동하던, 깨어있는 시민이었다. 호스피스 환자들이 평소 좋아하던 노래를 불러주면 매우 즐거워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곤 한다며 봉사 후일담을 전해주곤 했었다. 노래봉사팀 안에서도 레파토리를 정할 때 취향이 달라서 의견이 갈리기도 하지만 실제 호스피스 환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는 걸 제일 행복해한다는 깨알 팁도 알려주곤 했다. 정작 자신의 말기암 고통 앞에서 얼마나 위로의 시간을 가졌을까, 오래도록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에 편안히 떠났다는 따님들의 인사에 눈물 한 방울 훔치는 것으로 나의 애도는 끝이 났지만, 수년이 흐른 지금도 여름이면 언니의 하이톤 음성이 쟁쟁하게 귓전을 울린다. "잘 있니? 언제 커피 한 잔 하자."

남은 사람은 먼저 떠난 사람을 추억하게 되는 채무자인 것 같다. 길든 짧든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먼저 떠나면 그들과 나눈 숱한 이야기들 속에서 쉽사리 떠나오지를 못한다. 한 번이라도 더 먼저 전화해 볼 걸, 그날 아무리 바빠도 약속을 미루지 않았어야 했을 걸, 별 것도 아닌데 먼저 사과할 걸, 무수한 후회가 교차 된다. 그럼에도 아무 대책 없이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 일을 내일로 지연시킨다.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했던 하루가 바로 '오늘'이라는 걸 잊지 않기를, 아아 메멘토 모리!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듯해도 십수 년째 웰다잉(Well-dying) 강의를 하고 사회단체에서 연관된 일을 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변화되긴 했나 싶다. 예전 같으면 그냥 넘기기 어려운 일들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기에 따라 별일 아니라고 느껴지는 빈도가 늘었다. 관계라는 것이 상대성이라서 입장의 차이가 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조금은 수월하다. 물론 인간이기에 불쾌한 감정이나 오해도 일어나지만 해결력이 향상되는 모습을 대견해하며 자신을 셀프 칭찬하기도 한다. 그게 건강한 삶으로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최근 우리 사회는 초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각계에서 '존엄하고 아름다운 생의 마무리'를 위한 웰다잉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현장의 웰다잉 담론에서는 '관계 중심 돌봄'이 중요한 이슈로 제시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단지 신체 상태뿐만 아니라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관계의 경험과 연결되는 주체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웰다잉 강의를 통해 만나는 어르신들에게 '관계 통장' 이야기를 들려드린다. "칭찬과 감사, 배려와 공감은 예금이 되고, 무관심과 상처 주는 말, 미루어진 사과는 출금이 된답니다. 예금통장은 숫자로 채워지지만 관계통장은 마음과 행동으로 채운대요. 마이너스 통장 안 되게 관리 잘해야 된대요. 마지막으로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잖아요." 웃으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긴 시간 마음에 담아둔 사연들이 언뜻언뜻 떠오르는지, 눈가가 촉촉해지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 앞에 나의 삶도 다시 한번 갈무리된다.

오늘 '앎'을 얻은 사람은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때 언니가 그토록 살아서 하고 싶었던 꿈들을 기억해 주며, 오늘 나의 시간을 충실히 채워가는 것, 앎의 실천이다. 그렇게 웰다잉은 마지막 순간에 이뤄지는 사건이 아니라 관계통장의 잔고를 하루하루 채워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되뇌어본다. /홍인숙 대전웰다잉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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