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에서] 손절합니다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 편집국에서] 손절합니다

  • 승인 2019-08-11 10:30
  • 수정 2020-06-30 11:34
  • 신문게재 2019-08-12 18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20년 된 팬이었지만 실망스럽네요. 손절합니다. 다시는 TV에 나오지 마세요.'

최근 사생활로 곤혹스러웠을 어느 연예인의 뉴스에 댓글이 달렸다. 손절한다고 했으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음은 물론 그가 부른 노래도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이겠다. 수십 년간 응원해 온 마음을 하루 만에 끊어버리겠다고 말할 만큼, 누군가에게 그의 죄는 참을 수 없이 무거웠다.

어감에서 느껴지듯 단호하게 끊어버리겠다는 결심을 표현하는 '손절'은 원래 주식에서 사용하는 '손절매(損絶賣)'에서 나온 단어다. 시장에서 매입한 주식의 주가가 기대와 다르게 떨어졌을 때 차라리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 매도하겠다는 뜻이다. 지금은 금융권을 넘어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로 영역을 넓혔다. 자신에게 금전이나 명예, 심리적인 관점에서 손해를 끼치는 사람과 연을 끊는다는 의미다. 더 큰 손해나 상처를 차단하겠다는 계산도 들어있다. 손을 끊어버린다(切)는 뜻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는데, 의미는 비슷한데다 오히려 강렬하기까지 하다.

손절의 대상은 문학에도 있었다. 지난해 미투 이후 고은의 시 '그 꽃', 이윤택의 희곡 '오구-죽음의 형식' 오태식의 희곡 '춘풍의 처' 등의 작품이 교육부 검인정교과서에서 퇴출 결정됐다. 학생들에게 읽게 할 만큼 가치를 인정받았던 작품들은 창조자를 향한 도덕적 잣대에서 비켜가기 어려웠다. 교육계의 손절이다.

'손해를 보더라도 끊겠다'는 마음에는 씁쓸하고 축축한 상처가 느껴진다. 주식이었다면 가치가 오를 것으로 믿고 산 우량주나 기대주였을 것이다. 작가, 연예인이나 친구였다면 좋아하는 마음으로 떠올리며 미소 지은 적 있는 상대였을 것이다. 그 가치나 마음이 한 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이 생기고, 다시는 연결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손절'의 마지막 자음 'ㄹ'을 발음하는 혀끝에 비릿한 배신감이 맴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상대에게 손절당한 사람도 같은 마음을 갖는다. 손절 당한 걸 알게 됐을 때의 절망감은 방어의 촉수를 세우게 한다. 자기 잘못의 크기를 가늠해 보거나, 좋아한다더니 이해의 폭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느냐며 원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저질러도 나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나 가족, 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누가 손절했고 손절 당했는지도 불명확하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친분이 느닷없이 달라져 있을 때, 그 간극을 견디기 어려운 쪽이 손절을 감행한다. 더 이상 슬프고 싶지 않아서다.

대한민국은 일본 경제와 손절 중이다.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에 맞서 민간에서는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반도체 등 6대 분야 100개 품목을 5년 안에 안정적으로 국산화하겠다고 밝혔다. 당장 우리 기업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 손해를 감수하고 일본 산업에 대한 불필요한 의존을 끊어내고 나면 한국 경제 생태계는 이전보다 튼튼해질 것이다.

애초에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과 관련된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경제 손절이다. 한동안의 경제적 손해가 우려돼 아베 정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간다면 강제 징용 피해자 분들의 상처는 영원히 아물 수 없게 된다. 반성도 없이, '이미 저지른 죄'라는 거래 불가능한 대상을 가지고 역사를 저울질하려는 시도 역시 수없이 반복될 것이다. 이 손절에는 절망할 것도, 슬플 것도 없다. 우리에게 일본 아베 정부의 죄는 용서할 수 없이 무겁다.
박새롬 기자 onoino@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부산 영도 아이들이 고른 53곳, 한 장의 지도로
  2. ‘도마 퀸’ 여서정, 금빛 질주 이어간다.
  3. 세종 행정수도특별법, 9월 논의 불발… 국감 이후 격랑 속으로
  4. 대전시 트램 공사에 버스전용차로 축소 대책마련 시급
  5. 국군의날 기념행사를 '국민과 함께' 원년되나
  1. 서산해미읍성, 600년 시간의 문 활짝, "서산의 맛과 사람들 한자리에"
  2. 제8대 세종경찰청장에 김보준 안보수사심의관 임명... 경찰청 경무관 인사 단행
  3. 전기연 원장에 강상희교수·원자력연 원장에 정우식 교수 선임
  4. 대전 옛 대덕경찰서에 ‘육군 AX 거점’ 10월 문 연다
  5. 예산장터 삼국축제 10주년…'린' 소주 20만 병에 축제 홍보

헤드라인 뉴스


[르포] "이게 선사시대 움집?"…둔산선사유적지 곳곳 `허술한 보존`

[르포] "이게 선사시대 움집?"…둔산선사유적지 곳곳 '허술한 보존'

29일 대전 서구 월평동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둔산선사유적지.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시민들은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여느 도심 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하지만 유적지를 들여다보니 곳곳에서 어색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청동기시대 집터를 재현한 움집 세 채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선사시대 움집 재현은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움집 외벽은 짚이나 갈대로 덮여 있었지만, 지붕에는 인조 볏짚 형태의 합성소재가 덧씌워져 있었고 군데군데 파란..

상용화 문턱에서 좌절 `자기부상열차` 역사속으로
상용화 문턱에서 좌절 '자기부상열차' 역사속으로

대전의 대덕연구단지가 낳은 중요 연구성과물인 자기부상열차가 상용화의 문턱 앞에서 번번이 좌절을 겪으며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한때 대전 도시철도 2호선의 차종으로 선정되었고, 국립중앙과학관부터 엑스포과학공원까지 시민들이 직접 탑승하며 과학도시를 체험하는 연구성과물이었으나, 지금은 씁쓸한 뒷모습만 남았다. 한국기계연구원은 지난 8월부터 본원에 남아 있는 자기부상열차 시험노선을 철거하고 있다. 연구원 내 1.3㎞ 구간에 걸쳐 높이 5m 고가에 상판을 얹어 레일을 깔아 1997년부터 자기부상열차의 기술을 연구하고 실증하는 핵심 기반시..

`국립청주해양과학관` 미리 가보니, "기대 이상 콘텐츠"… 새 명소 노크
'국립청주해양과학관' 미리 가보니, "기대 이상 콘텐츠"… 새 명소 노크

전국 최초의 내륙권 국립해양과학관이 29일 청주시 청원구에 문을 열면서, 새로운 명소 탄생을 노크하고 있다. 이날 중도일보 기자가 개관 현장을 가본 결과, 머릿 속으로 그린 것 이상의 그림이 그려졌다. 이날 함께한 다수의 인사들과 방문객들도 같은 반응을 보였고, 이후 가족들과 재방문을 예고했다. 충북 청주시 청원구에 위치한 국립청주해양과학관은 2011년부터 장기간 정부의 예비타당성 검토를 거쳐 2019년 본궤도에 올랐고, 그동안 총사업비 983억 원 투입으로 이날 개관했다. 시설은 연면적 1만 4980 ㎡에 지하 1층~지상 3층 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나이는 숫자일 뿐’ ‘나이는 숫자일 뿐’

  • ‘개점휴업 언제까지’…구민들 의회 정상화 촉구 ‘개점휴업 언제까지’…구민들 의회 정상화 촉구

  • 10월부터 안전모 미착용 집중단속…벌점 10점도 부과 10월부터 안전모 미착용 집중단속…벌점 10점도 부과

  • ‘다시, 집으로’ ‘다시,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