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하악하악- 1박2일 덕유산 종주

  • 전국

[여행과 산]하악하악- 1박2일 덕유산 종주

  • 승인 2018-06-29 09:00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180628_155905260
남덕유산에서 바라본 웅장한 덕유산 자락.아침안개로 뿌옇다
악몽을 꾸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시계를 보니 밤 3시 조금 넘었다. 덕유산 종주한다는 생각에 며칠 신나 하면서도 잠들기 전까지 이런저런 근심이 꼬리를 물었다. '대피소에 나 혼자 묵는 건 아닐까? 험한 세상,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데….' 20대 후반에 대학 친구 두명과 지리산 등산 갔다가 대피소에서 자던 중 놀란 일이 있었다. 또래 남자 등산객이 방 한쪽에서 자다가 갑자기 춥다면서 우리 이불 속으로 들어와 기겁했었다. 산에 오르던 중 만나 얘기도 하고 저녁도 같이 먹은 게 화근이었다. 에이, 갑자기 내가 왜 쫄고 그럴까. 모양 빠지게시리.

배낭이 쌀자루를 멘 것처럼 묵지근했다. 무주 구천동 계곡길을 오르는데 벌써부터 헉헉거렸다. 무게를 최소한으로 했는데도 이틀간 산을 타기 때문에 이것저것 들어간 게 적잖았다. 잘 때 입을 옷과 양산, 물 두병, 오이, 김밥, 떡, 키위, 삶은 계란, 바나나, 사탕, 초콜릿바 등과 자잘한 것들. 책은 괜히 넣었나? 책 읽을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먹을거리가 많이 차지했다. 대피소에서 저녁은 사먹는다 쳐도 도중에 허기져서 졸도하면 큰일이지 싶었다. 배고픈 건 못 참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첫날은 삿갓재대피소까지 총 20㎞를 걸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향적봉 오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향적봉에서 멀리 아득히 첩첩으로 겹친 산을 넘고 넘어 남덕유산까지 가보리라 다짐하길 몇 번째. 드디어 대장정(?)에 올랐다.

덕유산은 아고산대로 정상은 키 작은 관목이 자란다. 밑에서는 볼 수 없는 꽃들도 지천으로 피었다. 화석이 돼버린 듯한 뼈만 남은 앙상한 주목도 간간이 눈에 띈다. 폭염 주의보가 발령돼 걱정했는데 해가 엷은 구름에 가려져 그다지 뜨겁진 않았다. 거기다 바람이 시원했다. 신이 날 도와주는 것 같아 신바람이 났다. 능선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오던 길을 뒤돌아 보니 까마득했다. 등산객도 중봉에서 보고 그 다음부턴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오직 새들만이 청아한 소리로 지저귀었다. 이파리가 무성한 키작은 나무가 길을 막아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기도 했다. 파도를 헤치듯 그것들을 손으로 헤쳐가며 한발짝 한발짝 나아갔다. 어깨는 뻐근하고 발바닥에선 불이 났다.

문득 망망대해 홀로 떠다니는 조각배에 의지한 한 사람을 발견했다. 갑자기 나 자신을 왜 그렇게 느꼈을까. 요즘들어 나이를 먹으면 죽어야 한다는 실존적인 명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엄마를 보면서 나의 노년을 상상하기도 한다. 지난 주말 멍한 엄마의 눈빛에서 늙는다는 건 역시 슬픈 일이란 걸 실감했다. 엄마가 지금보다 병이 더 깊어지면 날 알아볼 수나 있을까. 오늘 하룻밤 내 몸을 누일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이 길에서 내 삶의 여정을, 언젠간 맞게 될 죽음을 생각했다.



봉우리를 수도 없이 넘고 모퉁이를 돌고 돌다 보니 끝이 나왔다. 5시가 훌쩍 넘어 삿갓재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직원이 마당의 잡초를 뽑다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하도 반가워 눈물이 날 뻔 했다. 나무의자에 앉아 직원과 과자를 나눠먹으며 죽다 살았다고 엄살을 떨었다. 그 상냥한 직원은 대피소는 5일마다 교대근무를 한단다. 멀리 아득히 보이는 봉우리가 지리산 천왕봉이라고 알려줬다. 대피소는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안락했다. 나무로 된 이층 침대로 잠자리가 구분된 것이 무엇보다 맘에 들었다. 군용담요도 있다. 다만 세수와 손·발, 양치질만 가능했다. 그것도 감지덕지다. 인스턴트 순두부찌개와 과일로 배를 채우고 7시에 잠자리에 누웠다. 발가락은 부르트고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이었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 지하 취사장에서 등산객들이 참치찌개를 끓여먹는 지 얼큰한 냄새가 올라왔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침 6시 반에 대피소에서 나왔다. 종착지인 영각탐방센터까진 9.7㎞. 서둘러 걷지 않아도 되겠다. 쿡쿡 쑤시던 무릎과 발목의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런데 벌써 삿갓재대피소에 다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육십령에서 오는 거란다. 밤 3시에 출발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야간산행자들이었다. 해발 1507m. 남덕유산에서 보는 풍광이 기가 막혔다. 덕유산은 전북 무주·장수, 경남 함양·거창 4개 군에 걸쳐 있다. 덕유산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다.

덕유산은 6.25 당시 남부군(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빨치산의 활동영역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이현상은 입에 올리기조차 조심스러운 인물이었다. 서슬 퍼런 반공시절에 권력자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고 은폐되어 알려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익 측은 '빨갱이 이현상'에 대해 이를 갈았다. 금산이 고향인 이현상은 일제 강점기부터 민족의 독립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였다. 혁명가의 죽음은 끔찍하고 모욕적이었다. 그의 삶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남한 군경에 의해 끝났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처리돼 20일간 끌려다니며 서울 시내에 전시된 후 화장됐다. 죽어서도 오욕과 고통을 견뎌야 했다. 웅장하고 수려한 덕유산 자락을 바라보며 혁명가의 이상을 생각했다.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목이 메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비친다.

우난순 기자 rain4181@



등산코스: 무주구천동~향적봉~중봉~백암봉~무룡산~삿갓재대피소~남덕유산~영각탐방지원센터. 총 27㎞ 걸린다.

정보: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첫차가 7시 20분이다. 영각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르려면 대전복합터미널에서 함양 서상면으로 가는 차가 있다. 하루 한번 있다. 오전 7시 10분이다. 1시간 20분 걸린다. 함양 고속버스터미널 가는 차는 많다.

KakaoTalk_20180628_155621100
대피소는 최소한의 물만 사용할 수 있다.비누없이 얼굴과 손·발만 닦아야 한다.상황에 따라 치약으로 양치질도 할 수 있다. 쓰레기도 되가져가야 하는 건 물론이다.
KakaoTalk_20180628_160523937
삿갓재대피소 내부.
KakaoTalk_20180628_155310000
고목이 된 주목.
KakaoTalk_20180628_155409544
KakaoTalk_20180628_155724222
KakaoTalk_20180628_155511924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사설] 최교진 교육장관의 '교권 보호' 언급
  2. [월요논단] 교통약자의 편리한 이동을 위한 공공교통
  3. 지질자원연 창립 77주년, 새 슬로건 'NEO KIGAM 지구를 위한 혁신'
  4. [사설] K-스틸법으로 철강산업 살려내야 한다
  5. 특구재단 16~17일 '대덕특구 딥테크 창업·투자주간'
  1. 대전권 4년제 수시 경쟁률 상승… 한밭대·우송대 선전
  2. [홍석환의 3분 경영] 무능한 리더가 조직에 미치는 영향
  3. 폭우에 도로 잠기고 나무 쓰러져…당진서 알레르기 환자 긴급 이송
  4. 9월 무더위 계속…16일 충남 서해안 강우
  5. 조선 조운선 '마도4호선' 첫 발굴 10년만에 선체인양…나무못과 볏짚 활용 첫 확인

헤드라인 뉴스


역대 정부 `금강 세종보` 입장 오락가락… 찬반 논쟁 키웠다

역대 정부 '금강 세종보' 입장 오락가락… 찬반 논쟁 키웠다

이재명 새 정부가 금강 세종보 '철거 vs 유지' 사이에서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면서, 찬반 양측 모두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미래 방향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 정부부터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실제 노무현 정부 당시에는 행복도시 내 '금강 친수보' 건립으로 추진했으나, 문재인 정부에선 주민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철거'란 상호 배치된 흐름을 보였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보'와 태생이 다르나 같은 성격으로 분류되면서다. 지방정부 역시 중립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 환경부가 밀어부치기식 정책 추진을 할..

규제도 피하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주택신축판매업자 급증
규제도 피하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주택신축판매업자 급증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건설 승인을 받지 않고 주택 통계에도 포함되지 않는 ‘주택신축판매업자’가 전국적으로 8만7876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엄격한 주택법을 피하면서 주민 복리시설이나 소방시설 등 엄격한 규제조차 제대로 받지 않는 데다, 정부의 주택통계 작성과정에서도 빠져 부실한 관리를 초래해왔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더불어민주당 박용갑 의원(대전 중구)이 국토교통부로 받은 ‘주택신축판매업을 영위하는 개인·법인 가동사업자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국적으로 모두 8만7876개의 주택신축판매업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주택신..

정부, 추석 성수품 역대 최대 규모 공급... 최대 900억 투입 과일 등 할인
정부, 추석 성수품 역대 최대 규모 공급... 최대 900억 투입 과일 등 할인

정부가 추석 성수품을 역대 최대 규모인 17만 2000톤을 공급한다. 최대 900억원을 투입해 과일·한우 등 선물 세트를 최대 50% 할인하며, 전국에 2700여 곳의 직거래장터를 개설한다. 정부는 1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이러한 내용의 '추석 민생안정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농·축·수산물의 가격·수급 안정을 위해 공급을 확대한다. 공급 물량은 농산물 5만톤, 축산물 10만 8000톤, 수산물 1만 4000톤 등 17만 2000톤으로, 평시의 1.6배 규모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새마을문고 사랑의 책 나눔…‘나눔의 의미 배워요’ 새마을문고 사랑의 책 나눔…‘나눔의 의미 배워요’

  • 추석맞이 자동차 무상점검 추석맞이 자동차 무상점검

  • 제16회 대전시 동구청장배 전국풋살대회 초등3~4학년부 FS오산 우승 제16회 대전시 동구청장배 전국풋살대회 초등3~4학년부 FS오산 우승

  • 제16회 대전시 동구청장배 전국풋살대회 여성부 예선 제16회 대전시 동구청장배 전국풋살대회 여성부 예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