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열정 같은 소리 하네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열정 같은 소리 하네

  • 승인 2020-08-02 13:42
  • 수정 2021-05-12 15:02
  • 신문게재 2020-08-03 18면
  • 유지은 기자유지은 기자
m
때는 대학교 4학년 가을학기. 친한 선배의 간곡함에 넘어가 또 단편영화를 찍었을 때 일이다. 당시 제작부였던 나의 가장 큰 미션은 배우 찾기였는데, 다행히 여자원톱주연의 시나리오로 여배우 한 명만 찾으면 됐다. 물론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학생 영화의 배우는 교내에서 마스크만 맞는 아무나를 쓰는 게 대부분이다. (이것도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해야 될까 말까 한 게 현실이지만) 그런데 이번 연출은 좀 달랐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학생 나부랭이들의 영화일지라도 진짜 배우를 원했던 것. 마스크에 연기까지 보겠다는 심사였다. 당연히 비현실적인 요구에 짜증이 났으나 그 요구를 수행하는 게 곧 내 역할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냥 막무가내로 배우를 구해야했다. 그래서 왕창 뿌렸다! 영화 관련 구직사이트에 등록된 무명의 여배우들에게 영화의 기획안과 페이 조건을. '제발! 누구든! 아무나 걸려라! 아니, 걸려주세요!'라는 심산으로.

사실 그때, 좀 코끝찡한 현실에 감동했다. 필모에 과연 도움이 될까 싶은 이런 영화에 진심으로 출연하고 싶어하는 무명배우들이 넘쳐났다. 심지어 대부분 서울에 거주지를 두고 있어 포항까지 와야만 했는데도 말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앞뒤없이 열정을 쏟는다는 게 이런걸까 싶었달까.

그들은 정성스레 작성한 자기소개서와 연기영상을 내게 보내줬고, 난 그것을 연출에게 끝없이 조달했다. 그랬다. 끝없이. 그들의 열정과는 별개로 연출은 몇분만에 그들을 판단했다. 그런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희망과 위로의 말로 포장한 불합격 메일을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 반복되던 한날이었다. 배우가 또 킬됐다는 소식에 몇번째인지도 모를 불합격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이런 뻘소리로 선배가 날 멈춰 세웠다. "야. 떨어졌다는 메일을 왜 보내, 귀찮게." 순간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정적. 소리없는 내 분노가 느껴졌을까. 선배가 슬쩍 자리를 떴다. 아마 그때의 난, 말 그대로 부들거리고 있었을 거다.

몇 년이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그때의 분노가 생생하다. 불합격 메일은 배우의 절박한 열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선배는 그 예의를 귀찮음으로 전락시켰다.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 열정에 기대 영화를 완성시켜야 했던 선배가 할 소린 아니었다. 그 마음이 귀한지 모르는 이 싸구려 영화엔 출연하지 말라고 광고를 하고 싶었달까.

다행히 나름의 정의구현이 이뤄지긴했다. 내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그때만큼은 선배도 조건없는 열정이 얼마나 간절했던건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결국 배우찾기에 실패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유지은 기자 yooje8@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 행정수도법 논의 물꼬 트나… 28일 소위 유력
  2. 대전 3대 하천 가을 꽃단지 ‘인기’
  3. 기후부, 전력망 주민참여 확대 개정안 입법예고… 대전서 집회 지속
  4. [2026 국감] 국립대 통합 성패 쟁점…충남대·공주대 재추진, 충북대·교통대는 무산
  5. '6년 공회전' 대전역세권 개발의 민낯… 500억 손실에도 한화 철수
  1. 대전 도안2-13지구 도시개발(가칭) 추진… 유성구, 주민 공람 진행
  2. STN 스포츠, 레쥬와 골프 예능 '골당 TV' 11월 첫 방송
  3. 대전역세권 사업 2027년 재공모 들어간다… 환승센터 등 나눠 공공투자 전환 여지도
  4. 정규직-비정규직, 갈수록 벌어지는 임금 격차
  5. 구민 등진 국민의힘…대덕구의회 원구성 또 불발

헤드라인 뉴스


대전의료원 어떻게 지을까… 시공사 공고 앞 주민·의료계 의견 듣는다

대전의료원 어떻게 지을까… 시공사 공고 앞 주민·의료계 의견 듣는다

지역 최대 숙원 사업 중 하나인 대전의료원 건립과 관련 대전시가 구체적인 기능과 설계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논의에 본격 시동을 건다. 시공사 선정 절차를 앞두고 주민 의견청취와 전문가 포럼을 잇달아 열고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에 대비한 공론화 작업에 나서는 것이다. 22일 대전시에 따르면 시는 오는 11월 중 대전의료원 시공사 선정을 위한 기술제안방식 공고를 추진할 계획이다. 기술제안방식은 참여 업체가 의료원의 공간 구성과 시공계획 등을 직접 제안하고 이를 평가해 시공사를 선정하는 절차다. 단순히 정해진 설계에 따라 업체를 선정하는..

대전 금연구역 5만여 곳에 지도원 35명… 단속 한계에 정책 실효성 의문
대전 금연구역 5만여 곳에 지도원 35명… 단속 한계에 정책 실효성 의문

대전시가 간접흡연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금연지도원을 배치하고 금연구역 내 흡연 과태료를 인상했지만 일부 자치구에서는 수년째 적발 실적이 없어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지역 내 금연구역은 5만여 곳에 달하는 반면, 현장 점검과 계도를 담당하는 금연지도원은 35명에 그쳐 관리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21일 대전시에 따르면 지역 내 금연구역은 5만 580곳이다. 자치구별로는 서구가 1만 4881곳으로 가장 많고, 유성구 1만 4721곳, 중구 7327곳, 대덕구 6898곳, 동구 6749곳이다. 시청 소관 금연구역은 4곳이다...

청와대·국회·부처 이전 감안한 청주공항 시설 확충 필요
청와대·국회·부처 이전 감안한 청주공항 시설 확충 필요

대통령 세종집무실과 국회, 정부 부처 이전 등 '행정수도 완성' 계획에 따라 행정수도 관문인 청주국제공항의 시설 확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미 공항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넘을 정도로 이용객이 늘어난 데다, 정상외교와 국제회의, 공무출장 등까지 수요가 급증할 수밖에 없는 만큼 민간 전용 활주로 신설과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조국혁신당 황운하 의원(비례)이 22일 제공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청주공항의 국제선 여객터미널은 연간 15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2025년 실제 국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6 대전 장애인 취·창업박람회 성료 2026 대전 장애인 취·창업박람회 성료

  • 대전 3대 하천 가을 꽃단지 ‘인기’ 대전 3대 하천 가을 꽃단지 ‘인기’

  • 대전경찰청, 제81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개최 대전경찰청, 제81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개최

  •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건설폐기물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건설폐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