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표절의 유혹과 윤리적 책임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표절의 유혹과 윤리적 책임

송기한 대전대 교수

  • 승인 2025-09-15 09:44
  • 신문게재 2025-09-16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송기한 대전대 교수
송기한 대전대 교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각 부처의 장관이 선임될 때마다 임명 부적격의 사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표절이다. 특히 그 대상이 대학 교원 출신일 때, 이 문제는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대학 구성원들의 갈등이 있을 때에도 가장 먼저 문제 삼는 것이 이 표절 논란이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게 되면, 표절은 일상화된 일처럼 비치게 된다. 남의 글을 훔치는 일은 윤리적으로 분명 지탄 받을 행위이다. 그럼에도 이런 비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절은 근절되지 않고 계속 이뤄지고 있다.

표절에 대한 유혹은 누구나 한번쯤은 갖게 된다. 그렇다면 학자나 학생들은 왜 이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유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승진을 한다든가 학위를 받으려면 논문을 써야 한다. 또 연구비 등을 받기 위해서라도 논문은 꼭 필요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학자라면 연구를 많이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그러려면 많은 논문과 책을 써내야 한다. 그것이 학자로서 가져야할 최고의 품격이자 이상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공부란 누구에게나 하기 싫은 영역이다. 하지만 연구 업적은 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남의 글이나 생각을 슬쩍 훔치고 싶은 충동이나 유혹을 쉽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유혹에 빠지는 것은 개인의 일탈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에서도 찾아진다.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문(文)에 대한 숭상 의식이 그 하나이다. 이 관념이 고려 시대 무신 정권을 탄생시킨 근본 배경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그러한 전통은 조선 시대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무(武)를 경시하고 문을 우대하는 통치관념이 주자학적 질서의 근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단면은 조선 후기 박지원의 '허생전'에도 잘 나타나 있다. 허생은 집안 식구들이 아사 직전에 있음에도 책만 읽었고, 그가 책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가난을 구제할 책임을 면제 받았다. 아무도 경제적으로 무능한 허생을 비판하지 않은 것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문에 대한 숭상과 책에 대한 존엄한 자세들은 근대 사회에 접어들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한 사례의 한 단면은 향가를 연구하면서 자칭 국보 제1호라고 스스로를 규정한 양주동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주동은 조선인으로서 향가(鄕歌)를 처음 연구한 사람인데, 우선 그 연구 동기가 독특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어 교수로 재직하면서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평양 시장판을 돌아다니면서 장기 훈수 등을 두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심심하던 차에 숭실학교 도서관에 갔고 거기서 경성제국대학논문집이 꽂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펼쳐보니 거기에는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의 향가 연구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 연구는 이후 조선인이 시도한 모든 향가 연구들이 그의 아류에 불과할 정도로 대단한 성과물이었다. 어떻든 오쿠라의 글을 본 양주동은 많은 충격을 받게 된다. 나라를 잃은 것도 모자라 물론 정신까지도 빼앗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향가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양주동은 향가 연구를 위해 여러 지인들로부터 많은 책을 빌리게 된다. 그런데 '심심한 차원'에서 시작했던 그의 향가 연구는 책을 빌리는 과정에서 윤리적 무딘 감각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자신이 빌린 책은 돌려주지 않고, 자기 책은 남에게 절대로 빌려주지 않는 이상한 포즈를 취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절도 행위이지만 당시의 풍토에서는 이런 윤리적 일탈이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고 한다. 책에 대한 숭고성이 윤리적 감각을 무디게 했던 전형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책에 대한 숭고성은 책 도둑에 대해서도 한없이 관대한 일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식이나 책을 남몰래 가져가는 것은 윤리를 넘어 범죄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지식의 숭고성으로 윤리를 무디게 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법적 책임이 있어야 그 사멸된 윤리적 감각이 날카롭게 깨어나는 환경이 되는 것일까. /송기한 대전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충남 통합논의"…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2.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3. '물리적 충돌·노노갈등까지' 대전교육청 공무직 파업 장기화… 교육감 책임론
  4. 대전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 열려
  5.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1. 대전충남 행정통합 발걸음이 빨라진다
  2. 이대통령의 우주청 분리구조 언급에 대전 연구중심 역할 커질까
  3. 대전 동구, '어린이 눈썰매장'… 24일 본격 개장
  4. [기고] 한화이글스 불꽃쇼와 무기산업의 도시 대전
  5. 대전연구원 신임 원장에 최진혁 충남대 명예교수

헤드라인 뉴스


10·15부동산 대책 2개월째 지방은 여전히 침체… "지방 위한 정책 마련 필요" 목소리

10·15부동산 대책 2개월째 지방은 여전히 침체… "지방 위한 정책 마련 필요" 목소리

정부 10·15 정책이 발표된 지 두 달이 지난 가운데, 지방을 위한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 3단계가 내년 상반기까지 유예되는 등 긍정적 신호가 나오고 있지만, 지방 부동산 시장 침체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서다. 15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누적 매매가격 변동률(12월 8일 기준)을 보면, 수도권은 2.91% 오른 반면, 지방은 1.21% 하락했다. 서울의 경우 8.06%로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린 반면, 대전은 2.15% 하락했다. 가장 하락세가 큰 곳은 대구(-3...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제2문화예술복합단지대·국현 대전관… 대형 문화시설 `엇갈린 진척도`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제2문화예술복합단지대·국현 대전관… 대형 문화시설 '엇갈린 진척도'

대전시는 오랜 기간 문화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과 국립 시설 공백 속에서 '문화의 변방'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민선 8기 이장우 호(號)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형 시설과 클러스터 조성 등 다양한 확충 사업을 펼쳤지만, 대부분은 장기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민선 8기 종착점을 6개월 앞두고 문화분야 현안 사업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전시가 내세운 '일류 문화도시' 목표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프라 확충보다는 향후 운영 구조와 사업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중도일..

내란특검, 윤석열·정진석·박종준·김성훈·문상호… 충청 대거 기소
내란특검, 윤석열·정진석·박종준·김성훈·문상호… 충청 대거 기소

12·3 비상계엄 사태에 적극 가담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충청 출신 인사들이 대거 법원의 심판을 받게 됐다.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외환 의혹을 수사한 내란 특별검사팀(특별검사 조은석)은 180일간의 활동을 종료하면서 15일 '윤석열 전 대통령 등에 의한 내란·외환 행위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정진석·박종준·김성훈·문상호·노상원 등 충청 인사 기소=6월 18일 출범한 특검팀은 그동안 모두 249건의 사건을 접수해 215건을 처분하고 남은 34건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에 넘겼다. 우선 윤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대전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 ‘헌혈이 필요해’ ‘헌혈이 필요해’

  •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