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우리집 옥상이 해커의 침입로가 된다면

  • 오피니언
  • 춘하추동

[사이언스칼럼]우리집 옥상이 해커의 침입로가 된다면

한승문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책임연구원

  • 승인 2026-05-28 17:53
  • 신문게재 2026-05-29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한승문 책임연구원
한승문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책임연구원
지난해 4월 28일 정오 무렵,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서 갑자기 전기가 끊겼다. 지하철은 터널 한복판에 멈췄고, 신호등이 죽으면서 도로가 마비됐다. 병원은 비상발전기로 버텼고 휴대폰 신호도 사라졌다. 정전은 약 10시간 동안 이어졌고 사망자까지 나왔다. 다행히 사이버 공격은 아니었다. 유럽송전계통운영자연합(ENTSO-E)이 올해 3월 발표한 최종 보고서는 전압 제어 실패와 재생에너지 발전소 설정 문제 등 복합 요인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며칠간 유럽 전역이 사이버 공격을 가장 먼저 의심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만큼 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 속에 지난 3월 11일, 국가정보원이 '지능형 전력망 사이버보안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171쪽짜리 두꺼운 기술 문서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당신 집 옥상의 태양광 패널이 해커의 침입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전력망은 단단한 성벽 안의 도시였다. 발전소와 송전선, 변전소가 외부와 단절된 전용 통신선으로만 묶여 외부 침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금은 다르다. 지붕 위 태양광, 아파트 단지 에너지저장장치(ESS), 골목 전기차 충전기가 모두 전력망과 실시간으로 대화한다. 전국 태양광 발전소는 이미 수십만 곳, 가정마다 달린 스마트미터는 수천만 대다. 똑똑해진 만큼 들어올 수 있는 문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 곳만 잘 잠가서는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가이드라인이 경고하는 공격 시나리오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첫째, 전국 태양광 발전소 수천 곳을 동시에 해킹해 일제히 끄고 켠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둘째, 변전소 제어망에 침투해 원격감시제어시스템(SCADA)을 마비시킨다. 도시 전체가 깜깜해진다. 셋째, 가장 끈질긴 지능형 지속 위협(APT, Advanced Persistent Threat) 공격이다. 해커가 몇 달간 시스템 안에 조용히 숨어 정보를 모은 뒤 결정적 순간에 일격을 날린다. 넷째, 집집마다 달린 스마트미터 수천만 대가 거꾸로 공격 무기로 둔갑한다. 작은 단말기 수천만 개가 모이면 거대한 무기가 된다.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5년 12월 23일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 해커 조직이 전력회사 세 곳에 침투해 변전소 30곳을 일제히 차단시켰다. 한겨울 약 22만 5천 명이 1시간에서 6시간 동안 정전 속에 떨었다. 직원들이 받은 평범해 보이는 메일 한 통이 수개월에 걸친 잠복의 시작이었다. 누군가 첨부파일을 무심코 클릭한 그 순간이 국가 전력망의 첫 번째 무너진 벽이었다. 인터넷 너머 누군가가 변전소 차단기를 마음대로 끌 수 있다는 사실이 이때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그 충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이드라인은 발전, 송변전, 배전, 계통운영, 분산자원, 수요관리, 전기차 충전, 미터링이라는 8개 영역을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로 보고 보호한다. 동네 길목 하나만 잠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출입구를 동시에 살피는 일이다. 가장 묵직한 메시지는 "침입을 100% 막을 수는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대신 침해가 일어나도 운영이 무너지지 않는 '회복력'을 강조한다. 지진을 막을 수 없으니 무너지지 않는 건물을 짓자는 내진 설계와 똑같은 발상이다. 누구도 무조건 믿지 않는다는 '제로 트러스트', 설계 단계부터 보안을 녹여 넣는 '보안 내재화'가 새 표준으로 떠올랐다. 사고는 결국 일어난다는 냉정한 전제 위에 시스템을 다시 짠다는 것이다.

시민에게도 새 상식이 필요하다. 앞으로 가전제품 에너지효율 등급을 따지듯, 전기차 충전기와 태양광 인버터를 고를 때는 보안 인증 여부도 함께 따져봐야 한다. 펌웨어 업데이트 알림을 미루지 않는 것, 기본 비밀번호를 바꿔두는 것 같은 사소한 습관도 결국 국가 전력망을 지키는 일과 이어진다. 정전은 더 이상 자연재해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동네 충전기 한 대, 옥상 인버터 하나가 국가 전력망의 입구가 되는 시대다. /한승문 한국전기연구원 책임연구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충청권 광역철도·국도32호선 대체우회도로 건설 '고비 넘었다'
  2. 천안시 인구 71만명 돌파
  3. 충청권 시·도지사 李대통령에 핵심 현안 관철 촉구
  4. 한밭대 총장선거 3파전…‘연구·재정·산학협력’ 해법 경쟁
  5. '교육예산 확대→축소' 달라진 최교진? 지방교육교부금 개편 파장
  1. 충남대병원 구윤서·권은진 교수, 어지럼 진단부터 치료·재활 플랫폼 개발 착수
  2. '5극3특 성장엔진'에 충청권, 차세대 반도체·디스플레이, 고부가 바이오 의약·소재 등 4개 선정
  3. 충청권 학생 2만명 감소… 초등생 급감이 주도
  4. 누리호 5호기 발사 '카운트다운'…소자·부품 우주검증 '대전샛' 곧 고흥으로
  5. 세종기후·환경네크워크, 폭염 취약계층 지원 눈길

헤드라인 뉴스


대전시 지역화폐,  온통대전으로 옷 바꾸고 혜택 늘려 재개

대전시 지역화폐, 온통대전으로 옷 바꾸고 혜택 늘려 재개

대전시 지역화폐가 민선 9기 출범과 함께 '온통대전 2.0'이 옷을 갈아 입고 더 큰 혜택으로 재개된다. 앞서 대전시는 재정 부족으로 지역화폐 캐시백 지급을 중단했는데, 민선 8기 출범 이후 예산을 확보해 9월부터 연말까지 캐시백을 지급할 방침이다. 허태정 대전시장은 27일 시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24년 기준 대전지역 소상공인 폐업률이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두 번째인 10.4%에 이를 정도로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시민에 소비 기회를 줄 수 있도록 온통대전 2.0을 지역 순..

기준금리 3% 시대, 50조 넘어선 충청 가계부채 적신호... 주담대 금리 8%대 넘어서나
기준금리 3% 시대, 50조 넘어선 충청 가계부채 적신호... 주담대 금리 8%대 넘어서나

기준금리가 두 달 연속 0.25%씩 인상된 3%까지 올라서면서 50조 원을 넘어선 충청권 시중은행 가계부채에 건전성 관리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미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단이 7%대를 넘어선 상황에서 기준금리 인상까지 겹치며 8%대를 웃돌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나오는데, 가까스로 잡힌 연체율이 재차 상승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7일 기준금리를 연 2.75%에서 3%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7월 0.25%포인트 인상한 데 이어 두 달 연속 금리를 올렸다. 곧바로 연달아 금리를 올린 건 이번이 처음..

정부 `국도·국지도 건설 계획` 충남 8개 사업 예타 통과… 1조 1609억 `역대 최대 규모`
정부 '국도·국지도 건설 계획' 충남 8개 사업 예타 통과… 1조 1609억 '역대 최대 규모'

충남도가 국도·국지도 건설 8개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를 일괄 통과하면서 역대 최대 규모의 교통망 확충 예산이 반영될 예정이다. 도는 이번 예타에 통과하지 못한 4곳에 대해서도 추후 반영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홍종완 도 행정부지사는 27일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토부 제6차 국도·국지도 건설계획(2026~2030년) 후보 사업 중 8개 사업이 기획예산처 일괄 예타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예타를 통과한 사업은 ▲당진 정미-송악(1593억 원) ▲공주 신영-문금(1389억 원..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입 수시 앞 실기준비 ‘구슬땀’ 대입 수시 앞 실기준비 ‘구슬땀’

  • ‘청렴문화 함께 만들어요’ ‘청렴문화 함께 만들어요’

  • ‘온통대전 2.0’ ‘온통대전 2.0’

  • 배롱나무와 유회당 배롱나무와 유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