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세습무예 집안에서 태어나 소리와 춤을 추는 것이 운명이라 믿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외길 인생을 걸어온 사람들. 이들은 명창으로 또는 무형문화재로 국민들에게 각인 됐죠. 명창 공대일도 세습무예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딸인 공옥진도 아버지와 비슷한 운명을 받아들이고는 예인으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대한人 주인공은 명창 ‘공대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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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태 사진작가가 찍은 공대일 명창. 출처=국악신문 |
▲재야의 명창, 수많은 소리꾼들의 스승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공대일은 1911년 전남 출생으로 광주에서 활동하던 근현대 명창입니다. 송만갑 국창의 제자인 공창식과 공기남 명창과도 한 집안으로 15세부터 공창식에게 ‘홍보가’, ‘춘향가’를 부분적으로 배웠다 합니다.
박동실에게 심청가를, 성원목에게 춘향가를, 임방울에게 수긍가를 전수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공대일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집안소리로 ‘고사소리’를 배워 전승했다는 점입니다. 고사창은 고사굿에서 불리는 모든 노래를 총칭하는데, 타 지역에 비해 전라도의 고사창이 가장 성행했고, 공대일 명창의 고사창은 시대에 비해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고사문화가 대다수 사라져 전승 위기에 몰려 있기도 합니다.
공대일을 제야의 명창이라 부르는 이유는 판소리 공연을 일체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는 1955년 광주호남국악원 소리선생으로 취임하며 40여년을 판소리 전수에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고사창과 함께 박동실제 서편제 전 바탕을 부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녹음본이 남아있지 않아 후세에 전해지지는 않았습니다. 박동실제의 서편제는 초기 서편제의 정통성 살린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받은 고난과 박해를 판소리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인정받습니다.
이후 공대일은 1974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홍보가 보유자로 지정됐습니다. 구성진 수리성과 기교적인 소리가 일품이었다 합니다.
그는 광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낸 스승으로도 꼽힙니다. 그러나 공대일은 도막소리를 가르치는 데에는 탁월했으나, 그의 소리를 온전히 전승받은 제자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여러 사람에게 배운 소리를 자신이 재구성했기 때문이라는데요. 공대일의 바탕을 모두 전승받은 후학이 없다는 사실은 아쉬움이 크게 남는 대목인 듯싶습니다.
송순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적벽가 예능보유자와 김일구 적벽가 보유자 후보가 대표적인 공대일 명창의 제자로 꼽힙니다.
공대일은 수많은 소리꾼들의 스승으로 한평생을 보낸 뒤 1990년 2월4일 타계합니다.
▲ 슬픔도 웃음으로 해학의 끝… 창무극의 1인자 딸 공옥진
공대일 선생의 딸인 공옥진 여사는 아버지보다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죠. 병신춤과 1인 창무극의 선구자로 전라도 무형문화재 29-6호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부녀 예능 보유자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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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 공옥진 여사 모습. 중도일보 DB |
곡부 공씨 가문인 공대일과 공옥진의 집안은 세습무예를 대대로 이어온 집안으로 위로는 8촌 형 공창식 명창이 있고, 선대로 올라가면 왕의 남자의 주인공이었던 공길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고 전해집니다. 곡부 공씨는 공자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공옥진 여사는 아버지의 징용을 막기 위해 무용가 최승희의 몸종으로 1000원에 일본으로 팔려갔고, 불교에 귀의해 3년 여 간을 비구니로 참선하기도 했죠. 이후 다시 세상으로 나온 공옥진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춤과 소리를 통해 굴곡진 삶에서 얻은 모든 감정을 섞어 곱사춤과 병신춤으로 유일무이한 예술세계를 펼칩니다.
유명세에 비해 공옥진은 뒤늦게 무형문화재로 지정됩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2010년에야 비로소 문화재 타이틀을 얻게 되는데, 이유는 그의 춤에 전통성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뇌졸중으로 투병하던 공옥진의 사연이 미디어에 전파되며 국민들은 공 여사가 무형문화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놀랐었죠. 이후 전라남도는 문화재위원회를 열고 전통 판소리에 기반을 두고 문화 변용을 이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공옥진 여사의 기록을 찾다보니 1996년 3월 11일 대전시민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라 대전시민과 만난 적도 있었네요.
가족에서 가족으로, 아버지에서 딸로 이어진 하나의 운명. 다른 길은 선택할 수 없었던 우물 안의 삶이었을지라도 그들은 우직하게 걸어왔습니다. 부녀의 소리를 통해 누군가는 눈물 흘렸고, 부녀의 춤을 보며 해학의 진수를 맛보았을 겁니다.
이 시대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예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죠. 공대일 명창이 자신의 명예보다 후학양성에 올인 했던 것 또한 예인으로써 지키고 싶었던 선은 아니었을까요.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득음이라는 고난의 과정을 겪고, 소리 전승을 위해 한평생을 받친 그의 삶에 경외를 표합니다.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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