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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찬 국립한밭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
그러나 지금 한국은 외풍보다 더 심각한 내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25년 5월 현재,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대통령이 파면되고, 국무총리와 경제부총리까지 동시에 사퇴하면서 정부 최고위 리더십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국정 중심축이 무너진 가운데 외교·경제 정책의 방향은 불분명하고, 세계적인 통상 위기에 대응할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지금, 국가 경쟁력 전반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혼란에 휘둘리지 않고 제도와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특정 지도자의 결단보다 위기 속에서도 작동하는 관료조직과 기업, 전문가 집단의 협력이 절실하다. 산업부와 외교부, 기재부 등의 실무진이 중심이 되어 민간 기업과 학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민관 협의체를 조속히 구성해야 한다. 이른바 '통상 비상체계'가 작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정 리더십이 일시적으로 부재하더라도 실무 중심의 대응 구조만 제대로 움직인다면 지금의 위기를 최소화할 수 있다.
정상 외교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실무 외교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외교부 고위 인사들이 미국, EU, 일본 등과의 통상 대화 채널을 가동하고, 동남아 및 중남미 국가들과의 다자협력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아세안, 호주, 캐나다 등과의 연대는 미국의 일방적 통상 압박을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다.
한국 기업들도 자율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대기업들은 미국 현지 공장 확대와 생산기지 분산을 통해 관세 리스크를 줄이려 하고 있다. 정부는 수출입 금융 지원, 법률 자문, 규제 유연화 등 실질적 조치를 병행해야 한다.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핵심소재 개발과 기술 자립화도 장기 관점에서 지원을 이어가야 한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반도체는 단순한 수출품이 아니라 외교·안보의 전략 자산이 되었다. 첨단 제조기술, AI 칩 개발, 소재·장비의 국산화는 민간 기업만의 과제가 아니다. 이를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은 단 한 번의 무역 충격에도 휘청일 수 있다.
헬스케어 산업도 마찬가지다. 팬데믹 이후 한국은 바이오의약품, 정밀의료, 의료 AI 등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미국의 규제 변화와 보호주의는 수출 확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미국산 우선구매' 원칙이 확대되면, 인증과 유통에서 국내 기업은 차별을 겪을 수 있다. 이에 대비해 정부는 국제 인증 협력과 임상시험 상호인정 체계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미국의 관세 조치가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을 위반할 경우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고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외교적 지렛대를 확보해야 한다. 법적 대응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당한 외교 논리와 원칙을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지금은 새로운 경제 패권 시대에 대비할 시점이다.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선 기술력, 혁신 역량, 안정적 공급망이 핵심이다. 반도체, 2차전지, 바이오 등 미래 산업의 자립화 전략은 단기 대응을 넘어 국가 생존의 전략이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의 부재가 곧 국정 마비로 이어져선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건 작동하는 시스템과 연대하는 사회다. 정치 공백이 위기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실패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2025년 5월의 대한민국이 풀어야 할 절실한 해법이다. 민병찬 국립한밭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민주평통 대통령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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