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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진 한남대 교수/문학평론가 |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텅 빈 백지 위에 쏟아지는 램프의 황량한 불빛'은 모든 창조적 글쓰기를 향한 영혼의 여정과 고뇌를 압축한다. 고뇌 어린 영혼은 램프의 불빛을 비추며 사막 같은 어둠을 새다 새벽을 맞을 것이다. 백지의 사막, 사막 같은 백지, 그 순결한 처녀성은 사막처럼 막막하고 황량한 공포다. 그것은 또 오아시스처럼 저만치서 손짓하지만 다가가면 이내 다시 그만큼의 거리로 저만치 물러서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아침이 오고 백지의 순결한 처녀성에 좌절하고 패배한 경험이란 공포, 그럼에도 떨칠 수 없는 매혹이다.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왜 문학비평을 공부하게 되었나요? 좀 난감하고 쓰린 질문이다. 난감한 것은 꿈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혹은 심미적인 자질이 있어서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기 때문이다. 속이 쓰린 것은 사막을 건너다 맞이한 새벽의 무수한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창작에 실패한 이유가 크다. 사막 같은 백지의 처녀성은 나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고, 좌절 끝에 꿩 대신 닭을 선택한 것이다. 그동안 들인 시간은 아깝고, 또 달리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없어 창작의 언저리에 빌붙어 기생 하게 되었다는 게 대답이다.
사막을 건너는 나그네는 저만치서 손짓하는 신기루를 보고 지친 발걸음을 옮긴다. 나그네는 조금만 더 가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가 찾은 오아시스는 신기루처럼 다시금 저만치 물러나 다시 손짓한다. 다가서면 저만치 물러서고 또다시 다가서면 또 다시금 저만치 물러나 나를 부르는 영원의 여인, 나그네는 결코 그녀에 다다를 수 없다. 조금만 더 가면 그녀에게 도달할 줄 알았지만, 다가서면 그녀는 항상 저만치서 나를 다시 부른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결핍된 욕망, 잉여된 결핍의 욕망이 막막한 사막을 건너게 하는 힘인 것처럼 좌절된 글쓰기가 꿩 대신 닭의 길을 가게 한 것이다.
문학을 하겠다는 아들에 대해 아버지는 써먹지도 못할 그깟 것을 해서 밥은 먹고 살겠냐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렇다. 문학은 한낱 '그깟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근대 이후 문학은 이제 더 이상 권력에 이르는 지름길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깟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으며 아직도 살아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출세는 물론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문학을 전업으로 밥 먹고 산다는 것은 몇몇 유명 작가를 제외하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꿈꾸고 희망하는 이들은 왜 이리 많은지, 그들의 영혼이 가엽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살려내기 위해 지하세계로 찾아든다. 그러나 금기를 깨고 아내를 살리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녀의 두 번째 죽음은 오르페우스의 시선, 즉 실패와 관련이 있다. 에우리디케는 영원히 잉여된 결핍이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찾았답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그리곤 그 사랑은 사라져버렸죠." 카라반세리의 이 아웃트로처럼 찾았다 싶으면 다시 사라지는 영원의 여인, 잉여된 결핍으로 우리는 산다.
김홍진 한남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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