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 양자역학의 시작이 된 흑체 복사

  • 오피니언
  • 사이언스칼럼

[사이언스칼럼] 양자역학의 시작이 된 흑체 복사

이강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광도측정그룹 책임연구원

  • 승인 2025-11-21 09:01
  • 신문게재 2025-11-21 18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clip20251120095432
이강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광도측정그룹 책임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에서 근무하다 보면 종종 외부 손님이 방문해 KRISS의 대표적인 실험 측정 장치를 관람하곤 한다. 필자가 속한 광도측정그룹은 손님께 주로 흑체 복사 표준광원 장치를 보여드리고 있다. 이 장치는 국제도량형국(BIPM)에서 세계 선두권의 측정역량을 인정받은 KRISS의 자랑스러운 성과기도 하다.

장치를 보신 많은 손님은 교과서에서만 보던 흑체를 직접 보니 신기하다고 말씀한다. 필자도 KRISS에 임용돼 처음 흑체를 보고 같은 이유로 신기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흑체가 교과서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흑체 표면에서 방출되는 빛의 색깔별 세기(분광 복사휘도, spectral radiance)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흑체는 모든 색깔의 빛을 완벽히 흡수하는 이상적인 물체로, 영어로는 'black body'라고 불린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은 흑체의 분광 복사휘도가 그 모양과 크기와는 상관없이 오직 흑체의 온도만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실험 기술의 발전 덕분에 온도에 따른 흑체의 분광 복사휘도 값도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당시의 고전 물리학 이론으로는 측정된 흑체의 분광 복사휘도 값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흑체에서 방출되는 빛의 에너지가 오직 플랑크 상수와 빛 주파수의 곱으로 결정되는 불연속적인 값이어야 한다는 양자가설(Quantum hypotheses)을 제안한다. 이 가설을 통해 실험으로 측정한 값과 매우 잘 일치하는 플랑크의 복사 법칙(Planck's radiation law)을 도출하게 된다.



플랑크는 그의 노벨상 강연에서 양자가설을 찾아내던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 고된 노력의 결실인 양자가설은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과 보어의 원자 모델 등 다른 물리학자들이 세우는 양자역학 초기 이론의 바탕이 된다. 최근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양자 컴퓨터 기술도 따지고 보면 이 양자가설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파생된 양자역학의 엄청난 성과들을 제외하더라도, 플랑크의 복사 법칙은 그 자체로 현대 과학기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성과이다. 이 법칙에 따라 우리는 온도계를 직접 가져다 댈 수 없는 상황에서도 물체가 방출하는 빛의 색깔별 세기를 분석해 그 물체의 온도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아주 먼 우주에 있는 별의 온도를 알 수 있게 됐으며, 제철소 용광로 쇳물의 온도도 알 수 있게 됐다. 팬데믹 시절 많이 활용했던 비접촉식 체온계도 플랑크의 복사 법칙에 근거해 만들어진다.

또한, 플랑크의 복사 법칙은 광도 측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표준광원을 제공해 준다. 플랑크의 복사 법칙에 따라 흑체의 온도를 알면 그 흑체의 분광 복사휘도를 바로 알 수 있고 파생되는 분광 복사조도(spectral irradiance)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활용해 KRISS와 같은 국가 측정 표준 기관은 최대한 이상적인 흑체 광원을 만들고, 이를 램프나 LED 등 다른 광원과 비교해 각 나라 광원 산업에 표준을 보급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KRISS의 흑체 복사 표준광원 장치가 이를 위한 장치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랑크가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던 시절 그의 지도 교수는 물리학이 더 이상 크게 발전할 여지가 없으니 다른 분야를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한다. 당시의 회의적인 전망과는 달리, 양자역학이 탄생해 물리학 분야의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소극적인 전망보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도전과 고된 노력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흑체 복사와는 관련이 없지만 한 문단 더 적고자 한다. 중도일보에서 지면을 마련해 주시고 KRISS 홍보실에서 추천해 주신 덕분에 부족한 점이 많은 필자가 올해 여섯 번 '사이언스 칼럼'에 기고할 수 있었다. 중도일보와 KRISS 홍보실 그리고 무엇보다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이강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광도측정그룹 책임연구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베일 벗은 대전역세권 개발계획…내년 2월 첫삽 확정
  2. 대학 경쟁시킨 뒤 차등 지원?…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 놓고 '설왕설래'
  3. 전국 학교 릴레이 파업… 20일 세종·충북, 12월 4일 대전·충남
  4. [기고] 디지털포용법과 사회통합
  5. 어기구 의원, ‘K-스틸법’ 후속 국가재정법 개정안 대표 발의
  1. 양상추 가격 급등 현상에 대전 소상공인도 직격탄... 높아진 가격에 한숨만
  2. '사건 25%↑' 대전경찰, 우수부서 찾아 시상…서부署·중부署 등
  3. 구직자로 북적이는 KB굿잡 대전 일자리페스티벌
  4. 대전상의-국정원 '기업 기술유출 예방 설명회' 개최
  5. 설동호 교육감 시정연설 "모두 균등한 기회 누리는 든든한 대전교육 만들 것"

헤드라인 뉴스


대전만 없는 `공립형 대안학교`… 학교설립 공약 끝내 실패

대전만 없는 '공립형 대안학교'… 학교설립 공약 끝내 실패

설동호 대전교육감의 10여년 숙원이었던 공립형 대안학교 설립 공약이 결국 이행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지 확보에 오랜 시간을 소모했지만 끝내 추진에 실패하면서 차기 교육감의 과제로 넘어가게 됐다. 20일 대전교육청에 따르면 올 초까지 추진했던 유성구 복용동 설립이 결국 무산됐다. 당초 AI 특성화 대안학교를 설립하려던 계획이었지만 교육부가 1월 중앙투자심사에서 대안교육 중심의 학교 설립을 주문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대안학교 성격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교육청은 주민 설득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른 부지를 알아보겠다고 물러..

특수공집방·국회법 위반 이장우 대전시장·김태흠 충남지사 유죄
특수공집방·국회법 위반 이장우 대전시장·김태흠 충남지사 유죄

국회 패스트트랙(Fast Track: 신속처리안건) 충돌 사건으로 기소된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당시 대표였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와 원내대표였던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을 비롯한 자유한국당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 11부(장찬 부장판사)는 19일 오후 2시 특수공무집행방해와 국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황교안 전 총리와 나경원 의원, 이장우 시장과 김태흠 지사 등 26명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형을 선고했다. 나 의원은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벌금 2000만원,..

[단독] 대전 법동 으뜸새마을금고, 불법 선거 논란
[단독] 대전 법동 으뜸새마을금고, 불법 선거 논란

사상 첫 직선제로 이사장을 선출한 대전 대덕구 법동 으뜸새마을금고가 불법 선거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대해 수사를 벌인 경찰은 최근 사전 선거 운동 혐의 등으로 올해 7월 당선된 이사장 A씨를 검찰에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경찰과 법조계에 따르면 올해 법동 으뜸새마을금고 이사장에 선출된 A씨는 공식 선거 운동 예정일 전부터 실질적인 선거유세를 펼쳤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새마을금고 이사장 선거는 2021년 제6대 선거까지 간선제로 진행됐지만, 올해 치러진 제7대 선거는 금고 설립 이후 처음으로 전체 회원이 투표에 참여했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은빛 물결 억새의 향연 은빛 물결 억새의 향연

  • 구직자로 북적이는 KB굿잡 대전 일자리페스티벌 구직자로 북적이는 KB굿잡 대전 일자리페스티벌

  •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찰칵’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찰칵’

  • 추위와 독감 환자 급증에 다시 등장한 마스크 추위와 독감 환자 급증에 다시 등장한 마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