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시련과 축복을 포용하는 성숙한 민주사회로

  • 오피니언
  • 오늘과내일

[오늘과내일] 시련과 축복을 포용하는 성숙한 민주사회로

김규용 충남대 스마트시티건축공학과 교수

  • 승인 2026-01-18 16:38
  • 신문게재 2026-01-19 19면
  • 송익준 기자송익준 기자
김규용
김규용 교수
종교의 전통에서 시련은 신이 내리는 단죄의 불행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물음, 곧 "이 시련을 통해 나는, 우리는 무엇을 새롭게 보고 어떻게 더 인간답고 정의롭게 변해 갈 것인가"로 이어질 수 있다. 건강한 종교적 성찰은 시련을 계기로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되, 고통받는 이들을 "벌받은 자"로 낙인찍는 태도를 경계한다. 시련을 심판의 이유가 아니라 성찰과 변화를 시작하는 계기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련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인문학은 시련을 "이야기"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인간은 겪은 일을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서사로 엮어 삶의 의미를 만든다. 같은 상실, 같은 실패라도 어떤 이는 '인생 최악의 불행'으로, 다른 이는 '나를 바꾼 전환점'으로 기억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련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고 어떻게 기억하느냐이다. 현상은 같지만 해석이 달라질 때, 시련은 때로 축복으로 재탄생한다.



우리 현대사는 이 같은 통찰을 온몸으로 증명해 온 과정이었다. 전쟁의 폐허와 가난, 분단과 독재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지 상처로만 남겨 두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군부 독재를 넘어 민주주의를 스스로 쟁취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고통을 축복으로 전환하는 힘, 위기를 도약의 계기로 바꾸는 독특한 시민 역량을 키워 왔다. 이 경험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 국민의 취미는 국난극복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시련의 순간마다 놀라운 집중력과 연대로 위기를 넘어선 한국민의 특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국난극복이 우리의 '취미'라는 말이 자긍심의 기억에만 머문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시련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두 축에서 일정 수준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 성취만으로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양극화와 고령화, 청년 세대의 박탈감, 이념·지역·젠더 갈등이 겹겹이 쌓이며 한국 사회는 또 다른 형태의 시련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가 낳은 다원성과 갈등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성취는 오히려 분열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발목이 잡혀 퇴행적 과거로 돌아가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수적이다. 위기일수록 사람들은 익숙한 과거와 단순한 해법, 강한 지도자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 선동과 가짜 해법으로 쉽게 휘말리게 될 수도 있다. 성숙한 시민은 불안과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정보를 비판적으로 살피며, "옛 방식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유혹을 경계한다. 또한 독재와 탄압, 잘못된 정책이 남긴 상처를 기억하고, 같은 선택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학습 능력을 갖춘다. 무엇보다 결과만을 내세워 절차와 소수자의 권리를 희생시키려 할 때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양심과 책임감을 지닌다. 이런 시민의식이 있을 때, 시련은 우리를 뒤로 끌어내리는 힘이 아니라 더 나은 민주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시험대가 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시련은 애초에 축복이 아니다. 다만 그 시련을 겪는 이들을 사회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시련은 '다른 이름의 가능성'으로 바뀔 여지를 갖게 된다. 적절한 안전망을 제공하고, 실패를 허용하며, 재도전을 도울 때 시련은 한 사람을 파괴하는 운명이 아니라 함께 떠받치는 성장의 계기가 된다. 포용력이 없는 사회에서 시련은 약자를 더 짓누르는 불행일 뿐이지만, 포용력이 있는 민주사회에서 시련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제공하는 공동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개인의 의지뿐 아니라 사회의 책임,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함께 개입할 때, "시련과 축복은 다르지 않은 것"이라는 말은 비로소 민주사회의 포용력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제 한국 사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는, 위기 때만 잠시 발휘되던 국난극복의 힘을 일상의 민주주의와 포용의 문화로 옮겨 심는 일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시련은 더 이상 반복되는 상처가 아니라, 모두가 조금씩 더 인간답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김규용 충남대 스마트시티건축공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새 학기 첫날, '파업' 공무직 일단 웃으며 시작… 다음주 급식 파업 가능성도
  2. 'BRT-지하철-CTX' 삼각축, 세종시 대중교통 혁신 약속
  3. 세종상공회의소, 청년 취업 경쟁력 강화 인턴십 모집
  4. [S석 한컷]환호와 탄식! 정글 같은 K리그~ 대전 개막전
  5. 경제활동 재개 돕는 대전회생법원 개원… 4개 합의부 11개 단독재판부 발족
  1. [독자칼럼]'합격 통보 4분 만에 채용 취소'는 부당해고
  2. 교통사고로 휴업급여 신청한 배달기사 취업사실 숨겨 '징역형'
  3. 민주평통 세종지역회의, '한반도 평화공존' 지역 협력 강화
  4. "세종시 뮤지션을 찾아요"...13일 공모 마감
  5. 대전권 대학 신입생 등록률 100% 이어져… 중도이탈 막아라

헤드라인 뉴스


5일 지선 공직자 사퇴시한… ‘강훈식 거취’ 정치권 촉각

5일 지선 공직자 사퇴시한… ‘강훈식 거취’ 정치권 촉각

6·3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공직자의 사퇴 시한을 코앞에 두고 여야 최대 격전지 금강벨트가 출렁이고 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 등 충청 출신 또는 충청권에서 공직을 수행하고 있는 인사들의 출격 여부에 충청권 판세가 요동칠 수 있기 때문이다. 4일 대전선관위 등에 따르면, 공직선거법에 따라 6·3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공직자는 선거 90일 전인 5일까지 직을 사퇴해야 한다. 우선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충남 아산이 고향으로 3선 의원 출신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대전·충남 행정통합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통합특별시장 유력 후보..

코스피 이틀 연속 급락... 개미들 "나 떨고있니"
코스피 이틀 연속 급락... 개미들 "나 떨고있니"

중동 전쟁에 대한 불안감에 코스피가 이틀 연속 급락하며 투자자들의 공포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개장 직후 코스피200 선물 급락에 프로그램 매도호가 일시효력 정지인 사이드카가 이틀 연속 발동되고,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 거래를 일시 중단시키는 서킷브레이커까지 발생하며 지역 곳곳에선 개인투자자들이 탄식이 이어졌다. 4일 코스피는 장중 8% 넘게 하락하며 5000선 붕괴 가능성이 거론되며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 대형주들이 전날에 이어 10% 이상 하락세를 이어가며 주식을 보유 중인 투자자들의 한숨이..

“국힘과 이장우 시장·김태흠 지사는 행정통합 입장을 정하라”
“국힘과 이장우 시장·김태흠 지사는 행정통합 입장을 정하라”

더불어민주당 충남대전 통합 및 충청발전특별위원회는 4일 “국민의힘과 대전·충남 단체장은 행정통합에 대한 일관성 있는 입장을 정하라”고 촉구했다. 특위는 이날 논평을 내고, “김태흠 충남지사와 이장우 대전시장은 대전·충남 통합법안에 대해 '20조원 규모의 지원 방안이나 재원 마련 방식, 교부 기준이 누락되었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밝혔다. 특위는 “국힘이 필리버스터까지 중단하며 처리를 촉구했던 대구·경북 통합법 역시 20조원 규모의 지원 방안 등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어린이보호구역 과속 금지 어린이보호구역 과속 금지

  • 3.8민주의거 역사적 의미 살펴보는 시민들 3.8민주의거 역사적 의미 살펴보는 시민들

  • ‘더 오르기 전에…’ 붐비는 주유소 ‘더 오르기 전에…’ 붐비는 주유소

  • 즐거운 입학식…‘반갑다 친구야’ 즐거운 입학식…‘반갑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