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가 양으로 가득 찬 건괘(乾卦 )에서 온 것인데 악한 음이 생겨서 선한 양을 깎아 먹고 양 하나만 남겨놓은 모습이다. 양심 하나만 남겨놓았을 뿐이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또 괘상이 산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다. 땅 위에 산이 홀로 솟아 있는데 주변이 지탱해 주지 않으니 자꾸만 깎아 내리는 모습이다. 괘상이 이러하니 산이 깎이지 않으려면 아래를 두텁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작게는 집안이 편해지고 크게는 사회가 안정할 수 있다.『서경』에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평안하리라[民惟邦本 本固邦]'함이 같은 맥락이다.
여름에 무성하던 나무가 가을 음기로 낙엽지고 박락하기 때문에 서리가 내리는 음력 9월을 박월(剝月)이라고도 말한다. 음이 많고 양이 외로운 시절이니 소인배가 득세하고 군자 홀로 외로운 때다. 이 같은 때에 군자가 세상에 나가는 것은 불리(不利)하다. 세상에 나간들 뜻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장차 몸을 펴기 위함이요, 가을에 뱀이 땅 속에 칩거함도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봄에 다시 활동하기 위해서다. 소식(消息)하고 영허(盈虛)함이 천도의 순환하는 이치인 만큼 때를 따라서 움직이라는 것이 박괘에서의 설명이다. 박괘는 음효 위에 양효 하나가 위에 있으니 또한 과일이 가지 위에 달려 있는 상이다. 박괘 끝 구절에 '큰 과일은 먹지 말라[碩果不食]'했으니, 시골에 나무 위에 달려 있는 한 개의 감을 '까치밥'이라 하여 먹지 않고 남겨놓은 것이 이유가 있다. 과일 속에 씨앗[仁]은 천지(天地)가 생생(生生)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과일을 먹지 않으면 땅에 떨어져 썩을 것이고, 그 씨앗은 때가 되면 싹(仁)을 다시 틔우고 온 세상 봄을 이룰 것이다.
하늘은 만물을 다 죽이지 않는 법이다[天無盡殺之理]. 음양은 항상 공존하는 법, 인사(人事)가 천도와 다르지 않다. 씨앗이 다시 발아(發芽)하듯, 하나 남은 양심을 간직해두면 반드시 천리를 회복할 것이다. 때가 오면 이 '석과(碩果)'는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되므로 박괘는 또한 수레[輿]로도 비유했다. 수레는 물건을 싣기 위한 것이다. 세상 만물을 실은 것이 땅이므로 땅을 여지(輿地)라고도 하고 감여(堪輿)라고도 한다. 세상이 박(剝)한 때에 지식인이라면 수레를 얻어 도를 행해야 할 것이고, 세상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옛날 공자는 수레를 타고 천하를 주유했다. 수레는 제자인 남궁경숙이 마련해준 것이다. 공자는 그 때문에 도(道)가 더 넓게 행해졌다고 말했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이웃나라에서 벼슬하게 되어 공자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공자가 “내가 너에게 선물을 줘야겠는데 수레()를 줄까? 아니면 한 마디 말을 해줄까?”하니 자로는 한마디 말씀 듣기를 청했다. 수레는 자신이 감당하기엔 과중했으므로 사양했으리라.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인 소순(蘇洵)에게 두 아들 이름이 소식(蘇軾:호 동파)과 소철(蘇轍)이 있으니 이름자에 모두 '수레거'자를 썼다. 군자로서 세상을 위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오늘날 과연 수레 역할을 할 사람이 누구일는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주역학자·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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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국 주역학자·원광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