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벼랑 끝의 사람들

  • 사회/교육
  • 교육/시험

[춘하추동]벼랑 끝의 사람들

  • 승인 2017-07-18 15:22
  • 신문게재 2017-07-19 22면
  • 정성직 기자정성직 기자
▲ 김정숙(충남대 교수)
▲ 김정숙(충남대 교수)
김정숙(충남대 교수)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이육사, <절정>) 시인이 목도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현실은 완료된 시간이 아니다. 식민지의 칼날 위는 산업화를 겪는 동안 공장 굴뚝으로 옮겨왔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수도파이프 수리공인 난쟁이 아버지와 인쇄소에 다니는 어머니, 그리고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 두 아들 영수와 영호, 그리고 주머니 있는 옷을 입고 싶은 막내 영희,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다섯 식구의 일상을 그린다.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계고장이 나오지만 돈이 없어 이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아버지는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고, 사랑의 릴리푸트읍을 꿈꾸었던 난장이 아버지는 공장 굴뚝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의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낙원구 행복동’이다. 짐작대로 굴뚝은 우리가 사는 사회 현실을 상징한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지만 ‘갑을관계’, ‘일일노동자’, ‘하청’, ‘미생’, ‘비정규직’의 처지로 차별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원치 않았음에도 약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행복을 위해 한 가정의 가장들이, 어머니들이, 자식들이 굴뚝에 올라가야 하는 ‘난장이들’이 지금 이곳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외줄에 몸을 지탱하며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과로가 일상화된 버스 기사, 돌봄이 없는 고독사와 폭염에 폐지를 줍다 운명을 달리한 노인의 죽음, 안전장치 없이 위태롭게 매달려 일하는 에어컨 기사, 촌각을 다투어 일해야 하는 택배 기사와 음식배달원. 일할 기회마저 없는 청년들, 영혼을 벼리려 배고픔을 감내해야 하는 예술가들, 차별과 배제의 냉대를 받는 성소수자들, 가뭄과 홍수로 신음하는 이재민과 농민들… 열거할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삶의 곳곳이 위태로운 굴뚝이고, 그곳에서 우리들은 모두 난민이다.



굴뚝이 막히면 그을음과 유독가스에 덮여 질식하고 병든다. 바람이 잘 드나들 수 있도록 굴뚝은 뚫려 있어야 한다. 막히고 얽힌 문제들이 있을 때 외면하지 않고 함께 문제를 풀어내려는 의지와 소통의 노력이 절실하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 굴뚝은 밥을 위해 투쟁하는 절벽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나누는 따듯한 통로이어야 한다. 더 이상 고공 굴뚝에 올라가지 않아도 좋은 세상, 시린 굴뚝에 오르지 않아도 따듯한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사회가 행복한 공동체이다.

벼랑 끝의 사람들. 칼날과 굴뚝에서, 거리와 일터에서 실존과 생존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벼랑을 또 다른 벼랑으로 잇대면 길이 될 것이다. 죽임을 살림으로 바꾸는 환대의 길들. 청포도가 익어가는 칠월에 ‘고달픈 몸’을 맞이해 줄 하이얀 모시수건 같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믿고 의지하며 힘들고 아프지만 조금만 버티고 견디면 좋겠다.

10여년 전 수없이 이어진 의문과 자책과 내 안의 물음들로 몹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답을 찾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벗들의 위로가 있었지만 외롭고 쓸쓸했다. 막막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어렴풋이 빛이 보였다. 겨울이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말한 시인의 성숙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 후의 시간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토닥이면 다른 이의 마음도 쓰다듬을 수 있다. 꺾인 무릎을 세우며 다시 희망을 찾아보겠노라 썼던 그때의 몇 줄을 옮겨 본다. 지친 당신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람들은 가야할 길이 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만나 동행하기도 때로는 혼자 걸어가야 할 때도 생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 해 방황할 때도, 어려운 고비를 넘겨 안도의 숨을 쉴 때도 있다. 삶은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가야할 길이 있어 아름다운 나이. 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삶이기에 발을 내딛는다. 지금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KINS 기밀 유출 있었나… 보안문서 수만 건 다운로드 정황에 수사 의뢰
  2. 수도권 뒤덮은 러브버그…충청권도 확산될까?
  3. [춘하추동]새로운 시작을 향해, 반전하는 생활 습관
  4. [대전다문화] 열대과일의 나라 태국에서 보내는 여름휴가 ? 두리안을 즐기기 전 알아야 할 주의사항
  5.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경쟁 입찰 조회수 부풀리기 의혹 제기도
  1. 3대 특검에 검사 줄줄이 파견 지역 민생사건 '적체'…대전·천안검찰 4명 공백
  2.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3. [대전다문화] 세계 일회용 비닐봉투 없는 날
  4. 한국영상대 학생들, 웹툰·웹소설 마케팅 현장에 뛰어들다
  5. aT, 여름철 배추 수급 안정 위해 총력 대응

헤드라인 뉴스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경쟁 입찰 조회수 부풀리기 의혹 제기도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경쟁 입찰 조회수 부풀리기 의혹 제기도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비상대책위원회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가 상가 정상 운영을 위한 대전시민 1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대전시에 공청회 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 비대위는 경쟁 입찰 당시 상인 대부분이 삶의 터전을 잃을까 기존보다 많게는 300% 인상된 가격으로 낙찰을 받았는데, 높은 조회수를 통해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도록 조작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와 대전참여연대는 2일 대전시청 북문에서 '지속 가능한 중앙로 지하상가 운영을 위한 시민참여 공청회 청구 기자회견'을 열고 대전시에서 입찰을 강행한 결과 여..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반석역 3번출구, 버드내초인근 상권 등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반석역 3번출구, 버드내초인근 상권 등

숨겨진 명곡이 재조명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직원 대부분 반대·이직 동요"…해수부 이전 강행 무리수
"직원 대부분 반대·이직 동요"…해수부 이전 강행 무리수

"해수부 전체 직원의 86%, 20대 이하 직원 31명 중 30명이 반대하고, 이전 강행 시 48%가 다른 부처나 공공기관으로 이직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최민호 세종시장이 7월 2일부터 예고한 '해수부 이전 철회'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이날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5동 해수부 정문 앞에서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란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해수부 이전 철회를 촉구하는 입장을 정부부처 공무원을 넘어 시민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발걸음이다. 그가 해수부 이전에 반대하는 입장은 '지역 이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의정활동 체험 ‘재미있어요’ 의정활동 체험 ‘재미있어요’

  • 도심 열기 식히는 살수차 도심 열기 식히는 살수차

  •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 ‘수영하며 야구본다’…한화 인피니티풀 첫 선 ‘수영하며 야구본다’…한화 인피니티풀 첫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