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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영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나라의 한복판에 일본이 우뚝하다.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발발이라는 '시초'부터 우리와는 척지는 영원한 이방인(異邦人)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속담에 '할무이 어질면 손자 거름이다'는 게 있다.
이는 조상이 베풀면 그 공이 자손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반면 조상이 악행(惡行)을 펼쳤다손 치면 그 화(禍)는 역시도 자손에게 돌아간다는 걸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임진왜란의 발발 시초는 조선에서 일본에 보낸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이라는 두 사신의 어긋난 판단(判斷)으로부터 기인(起因)한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전쟁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김성일은 반대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역사적 상식이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선 김성일의 의견을 좇아 국방의 철저 대비를 놓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은 이윽고 2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 1592년 4월,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말도 안 되는 구실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다. 이어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한양을 향해 물밀 듯 쳐들어왔다.
수주대토(守株待?)의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의 임금 선조는 급기야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떠나기에 이른다. 이어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는데 이때 발군의 활약을 보인 인물이 바로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다.
홍순언의 모도리(빈틈없이 아주 여무진 사람) 낌새는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소문이 파다했다. 사건의 발단은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인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이며 이성계와 공민왕이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모함한다. 또한 이성계는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 거짓으로 알린 것이 '대명회전' 등의 역사서에 그대로 실린 데서 연유한다.
이로 인해 태조 때부터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시정이 되지 않다가 홍순언이 나선 뒤에야 비로소 이를 해결하기에 이른다. 이 공으로 홍순언은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진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홍순언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가게 되었다. 이때도 석성의 도움으로 명나라 원병을 파견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 여기엔 남다른 그의 남아다운 파격적 행보가 그 뒷받침이 되었음을 눈여겨봐야 옳다.
홍순언은 어려서부터 낙척(落拓)했지만 굳건한 의기(義氣)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조 11년(1578년)에 종계변무(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 말 권신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된 대명회전을 바로잡기 위한 사업)의 주청사(奏請使) 자격으로 중국 연경으로 간다.
그리곤 통주(通州)에 이르러 머물 때 술을 한 잔 하려 어떤 주루(酒樓)에 들르게 된다. 거기서 자색(姿色)이 뛰어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 때 조선의 누란(累卵)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홍순언을 접대하려 들어선 여인은 하지만 소복(素服)을 입고 들어선다. 이에 놀라 물으니 그 여인은 "제 부모님은 절강(浙江) 사람으로서 명나라 연경에서 벼슬을 살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동시에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한데 지금껏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사 지낼 밑천이나마 마련코자 이처럼 마지못해 몸을 팔고 있답니다"라고 하면서 오열했다.
이에 측은한 맘이 든 홍순언은 장례비를 물으니 3백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통이 컸던 그는 곧장 전대를 털어 그 돈을 모두 주고 밖으로 내보냈다. 여기서 감동한 그녀는 홍순언의 고마움을 뼛속 깊이에까지 각인하기에 이른다.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다더니 후일 그녀는 명나라의 정권 실세였던 예부시랑(禮部侍郞) 석성(石星)의 첩이 되었다. 그리곤 조선에서 오는 사신을 볼 때마다 반드시 홍순언이 함께 왔는지를 물어 살폈다.
이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당연한 의리의 발동이 그 단초였다. 석성 역시 자신이 아끼는 여인이 툭하면 홍순언의 고마움을 피력하자 반드시 보답하리라 다짐하던 터였다. 이윽고 홍순언은 1584년에 변무사(辨誣使 = 조선 시대에, 중국에서 조선에 대하여 곡해한 일이 있을 때 이를 밝히기 위하여 임시로 중국에 보내던 사절) 역관으로 황정욱을 수행하여 북경에 간다.
이 때에 비로소 그 여인과 석성까지 만난 홍순언은 결국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가 위태로울 때의 원군을 요청하기에까지 이른다. 당시 명나라는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였는지라 임진왜란의 참전에 망설였다.
하지만 끈질긴 홍순언의 요청과 그 여인의 각골난망(刻骨難忘)적인 읍소에 당시 병권의 실세였던 성석의 마음까지 마구 흔들기에 이른다. 때문에 명나라는 마침내 조선으로의 출병이 이뤄졌으며 이는 왜군의 패퇴로까지 이어지는 방점의 계기로 작용했다.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상처를 남겼다.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하면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전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전쟁 전에 비하여 1/3로 줄어들었으며 문화재의 피해도 심각했다.
이는 비단 조선에 국한되지 않았다. 명나라 역시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선으로의 대규모 원정군의 파견으로 말미암아 재정이 크게 약화되었다. 더불어 국력마저 쇠약해져 결국엔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멸망하고야 말았다.
반면 일본은 조선의 문화재와 선진 문물이 전해진(사실은 약탈이었지만) 덕분에 문화발전을 크게 이룰 수 있었다. 왜란 중에 전래된 퇴계 이황의 성리학이 일본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가 하면,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인 도공들을 납치하여 일본 도자기 발전의 기틀까지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마치 6.25 한국전쟁 중에 기다렸다는 듯 막대한 전쟁 특수로 인해 일본이 단숨에 경제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서두에서 언급한, 일본은 우리가 '영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나라'의 한복판이란 주장에 설득력을 강조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여기서 이제 이 글의 핵심이랄 수 있는 '만약에?'의 잣대를 동원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영웅들은 꽤 많다. 가장 대표적 인물이 이순신 장군임은 불문가지다. 이밖에 '홍의장군' 곽재우와 이순신을 추천한 '징비록'의 저자 서애 류성룡, 권율 장군과 김시민 장군, 그리고 숱한 의병과 승병들도 모두가 영웅들이다.
사견이지만 홍순언은 그중 발군(拔群)의 '애국자'였다고 강조하는 바이다. 만약에 그가 명나라 연경을 방문했을 당시, 가련한 처지에 몰린 처자에게 장례비를 주지 않았던들 어찌 명나라의 군사가 조선에까지 참전할 수 있었으랴.
기대와는 사뭇 달리 영화 '남한산성'이 흥행에선 죽을 쒔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원작으로 했으며 이병헌·김윤석·박해일·고수 등 호화 캐스팅만으로도 충분히 천만 관객 돌파는 불 보듯 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개봉되자 관객들의 반응은 엄동설한에 냉수를 끼얹은 양 냉담했다. 이 같은 반응은 모 교수의 "원작자의 문학적 문법을 그대로 영상적 언어로 치환하면서 일종의 오마주로 드러난 때문이며, 무엇보다 암울한 역사를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대중을 불편하게 했다"는 분석이 주인(主因)이지 싶다.
예컨대 역사적 팩트(fact)를 영상화하는 데 있어선 소위 '국뽕'으로써 애국주의의 촉수를 건드리든가, 아니면 영화 '암살'의 그것처럼 정의로 포장해 공분(公憤)을 일으켜야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홍순언은 당대 최고의 풍류남아(風流男兒)였다. 그가 가년스럽기 짝이 없었던 후일 석성의 첩에게 거금을 흔쾌히 던지지 않았던들 명나라의 조선 출병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에 그가 후일 석성의 여자가 될 여인을 단순히 논다니(웃음과 몸을 파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치부했더라면 과연 당시 조선의 운명은 어땠을까! 다시금 연말연시가 되면서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 등 '사랑의 온도탑'이 전국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갚고자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사랑의 온도탑' 온도가 금세 100도를 훌쩍 넘길 응원한다. '영웅(英雄)' 홍순언의 글을 쓰면서 새삼 한·중 간의 달짝지근한 관계밀착을 기대해본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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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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