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나쁘다며 커피를 전혀 안 마시는 동료는 "그렇게 많이 마시고도 속이 멀쩡해유?"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201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커피 소비량은 성인 1인당 377잔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에 필자를 포함시키면 그 수는 훨씬 증가했을 게 틀림없다.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커피에 대한 터키의 속담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커피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성 싶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아비시니아 고원에 살던 양치기 소년 칼디는 양들이 붉은 열매만 먹으면 흥분하여 뛰어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그 열매를 먹어 보니 신기하게 기운이 나고 상쾌해져서 열매를 이슬람 사원으로 가져갔다. 사원에서는 커피를 주로 기도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그처럼 메카에서 인기가 있던 커피는 다른 이슬람 도시로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오스만 제국 때에는 이스탄불에 '가누스 카프베'라는 최초의 카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신기한 붉은 열매, 즉 커피에 관한 소문은 봉인첩설(逢人輒說), 예컨대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하여 소문을 널리 퍼뜨림'의 빠른 속도로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의 예멘으로도 전파되었다.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 카페오레가 탄생한 건 모두 유럽에서였다.
그만큼 유럽은 커피를 다양한 방법으로 즐겼다는 얘기다. 의사가 치료로 권하면서 커피에 우유를 타기 시작했고, 값비싼 설탕을 넣어 커피 맛을 한껏 살리고 싶었던 건 프랑스의 루이 16세였다.
커피나무를 몰래 빼돌리는 데 성공한 네덜란드 상인들은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커피나무를 심어 재배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커피의 양대 산맥은 예멘의 '모카'와 인도네시아의 '자바'가 되었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은 '보스턴 차 사건(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식민지의 주민들이 영국본국으로부터의 차(茶)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사건. 이 사건은 1775년 무력충돌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미국 독립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이후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미국은 전 세계 커피 소비량 1위를 할 정도로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다.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 유럽 사람들은 수많은 노예를 이용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애호가는 고종 황제였다.
방화 '가비'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俄館播遷) 시기인 1896년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사이를 시대적 배경으로 '커피'와 '고종'을 둘러싼 음모와 비밀을 그려낸 작품이다.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를 때 먹기 시작하면서 고종은 커피광이 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후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들던 손탁이라는 여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점을 열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1877년에 네덜란드 사람이 커피를 전해주면서 커피 맛을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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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커피 드리퍼와 연유를 듬뿍 넣은 베트남 커피. |
그리곤 P.24~27를 할애하여 [역사의 아이러니를 가진 베트남 커피]를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 중 일부는 여기서 추출한 내용임을 밝힌다. 베트남은 우리나라 군대가 참전해 전투를 벌였던 나라다.
우리 국군의 참전과 그로 인한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대한민국에 대해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베트남은 과거의 상처보다 현재의 이익을 중시하는 민족성을 보이고 있어 놀랍다.
2016년 기준 2750만 포대의 커피생산을 이루면서 여전히 세계 2위의 커피생산국에 이름을 올린 베트남은 로부스타(Robusta) 커피에선 단연 세계최대의 수출국이라고 했다. 참고로 커피의 품종은 100가지나 되는데 그 중에서도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두 품종이 유독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표품종이란다.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 '아라비카'는 향기와 산미가 뛰어난 고급커피에 해당된다. 향과 산미는 거의 없고 숭늉처럼 구수하고 쌉쌀한 맛이 특징인 '로부스타'는 고향이 역시나 아프리카라고 한다. 이야기의 중심을 다시 베트남으로 옮긴다.
1771년 베트남 최초의 농민반란 이후에 1778년 베트남 남부의 '응웬' 가문과 북부의 '쩐(鄭)'이 무너져 내렸다. 1792년 '응웬'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응웬 안'은 프랑스의 서구식 군대 힘을 빌려 정적들을 일망타진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왕권이 수립되자 자기에게 크게 도움을 준 프랑스를 배려하지 않는 배신의 면모를 보였다.
다만 선교활동만 허락해 주었는데 이는 구한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처럼 그 또한 서구의 문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선 보수적 입장을 견지한 때문이었다. '응웬 안'에 이어 권좌에 오른 '민 망' 황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폈다.
급기야 선교사들의 추방명령까지 내리자 그들은 출국하지 않고 농촌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곤 정부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분기탱천한 황제는 프랑스 선교사 '르 베랭 프랑수아 가를랭'을 처형하고 개종한 베트남 신자들과 또 다른 유럽의 선교사들도 죽였다.
이 일을 기화로 프랑스는 베트남을 침범하였고 이후 베트남은 60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 식민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인 신부가 베트남의 토양에 커피나무를 옮겨 심었다.
이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시절에 전해진 커피나무가 이제는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기반산업으로 자리 잡았다니 그렇다면 이는 분명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겠다. 베트남은 무려 1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서기 180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중국으로부터 독립해서 독립 국가를 이룬다. 그러나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하니 그 나라의 운명도 어찌 보면 강대국에 포위돼 있는 우리나라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입장이랄 수 있겠다.
여하튼 베트남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커피대국의 입지는 다져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17 제9회 세계인 어울림 한마당 & 국제자선바자회>가 작년 10월 28일 10시부터 17시까지 보라매공원에서 열렸다.
취재를 위해 이곳을 찾았더니 '베트남 의상 입고 사진 찍기' 부스도 설치돼 있어 반가웠다. 평소 농담을 잘 하는 터다. 그래서 예쁘장한 베트남 여성에게 다음과 같은 농을 던졌다.
"아가씨, 아직 미혼이죠? 참 예쁘신데 나랑 데이트 한 번 할 생각 없어요?" 그러자 그 아가씨(사실은 결혼을 전제로 우리나라에 온 여성인지라 엄연히 '유부녀'겠지만)는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깔깔대며 웃었다. "아저씨, 지금 농담 따먹기 하세요?"
에고, 이놈의 주둥이가 말썽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베트남 의상이나 입혀주쇼." 언제부턴가 부쩍 더 가까운 이웃으로 자리매김한 국가가 바로 베트남이 아닐까 싶다. 미국의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1954년 발표한 <사회 비교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보통 '상향 비교'와 '하향 비교'로 구분된다고 했다.
먼저 '상향 비교'는 자신보다 더 우위에 있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인데 따라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하향 비교'는 나보다 더 열등한 사람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인데 덕분에 개인의 자아만족감과 자신감까지 향상된다나. 이런 얘길 첨언하는 건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오는 여성들(다른 국가 역시 마찬가지로)을 다시는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지만 그렇게 국제결혼을 함에 있어서 돈을 지불하고 동남아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구박을 한다거나 노골적으로 학대까지 하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국격까지 훼손하는 망발(妄發)이라고 본다.
그들이 없었다면 가뜩이나 줄고 있는 대한민국의 인구 증가는 과연 누가 할 것인가? 베트남 여성들이여~ 앞으론 '하향 비교' 마인드를 견지하면서 우리 함께 어울려 즐겁게 살아보자고요.(^^)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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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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