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20. 진안대군이 이성계의 권력을 탐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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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20. 진안대군이 이성계의 권력을 탐했더라면

'권불오년'에 오만방자 유감

  • 승인 2018-02-13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이성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조 이성계 역을 맡은 고 김무생.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일을 끝마치기는 그리 어렵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개국(開國)과 같은 중차대한 역사(歷史)를 창출하는 장르에까지 이른다손 치면 차원이 달라진다.



이 같은 개국의 시작에 태조(太祖)가 우뚝하다. '태조'라는 의미는 나라를 처음 세우거나 기틀을 잡은 사람에게 부여하는 존칭이다. 고려(高麗)를 뒤엎고 조선(朝鮮)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걸출한 대장부였다.

이성계의 가문은 전주(全州)의 토호였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이런저런 문제로 인해 의주(宜州)로 이사를 하면서 더욱 융성해졌다. 이안사에 이어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때까지 원나라로부터 천호(千戶)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이 지역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군림하는 세력가로 성장했다.



중국의 원말명초(元末明初) 교체기의 혼란한 국제 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공민왕은 1356년 원나라의 간섭 시기에 잃어버렸던 땅,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하였다. 이때 공민왕이 보낸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에게 협력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하였다.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외침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되어 군사 조직이 붕괴하고 국가 재정은 말이 아니었던 고려 말이었다.

비록 변방의 세력이었지만 착실히 군사력을 키운 이성계 가문의 힘은 막강했다. 이성계 집안은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탄탄한 사병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에 뿌리박고 살면서 키운 인맥과 경제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이성계는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동북면의 여진족과 고려인들을 수하로 부리면서 장수로서의 자질도 키워나갔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고려의 정치 무대에 모습을 보민 이성계는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성계의 활약은 당시 극심해진 삼남 지역의 왜구 침입을 막아내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나 해안 뿐 아니라 내륙에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던 극악한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서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후 이성계는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근 20여 년간을 고려 조정을 위해 일했다. 그가 치르는 전투는 모두 승리하였으므로 그는 '불패의 사나이', '난세를 구원할 영웅'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거듭되는 승전은 그를 고려 조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만들었고, 벼슬길은 승승장구였다. 또한 그의 인기와 명성을 좇아 많은 사람이 주변에 모여들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이미 그 운이 다한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신진사대부들도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일취월장하며 입지를 확고히 한다고 했음에도 이성계에게는 변방지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하여 누대에 걸쳐 뿌리내린 막강 권문세족들이 버티는 고려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그의 성장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같은 시기 이성계와 함께 외적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권문세족 출신의 고려 명장 최영(崔瑩)이 이성계로서는 그야말로 '넘사벽'의 난공불락 존재였다. 공민왕의 사후 정계를 주름잡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언제나 최영의 다음 자리였다.

기회를 도모하던 그는 결국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조선 창업의 기치를 높이 들기에 이른다. 요동 정벌대에 군사 대부분을 내주었던 최영은 적은 숫자로 이성계에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태산과도 같은 존재였던 최영마저 제거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손잡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까지 선죽교에서 죽이고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렇게 파란의 개국 토대를 마련했건만 이성계가 조선을 통치한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불과 6년 여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쯤 되면 가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비유가 낯설지 않다.

설상가상 그는 말년에 자식들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다툼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사자성어가 그에게서 말미암은 것임은 상식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내지 재산분배를 둘러싸고 자식들이 벌이는 다툼은 만무방의 차원을 넘어 목불인견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계기로까지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의 힘도 컸지만, 안으로는 이성계의 집안에서도 새 나라를 개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주인공은 이성계의 첫 부인 한 씨의 소생인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 태종)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강 씨(신덕왕후)였다. 개국공신에게 논공행상이 있듯 집안의 큰 조력자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베풂이 있어야 했다.

그중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다음 왕위를 잇는 세자의 자리였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세자 자리가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일등 참모 역할을 했던 정도전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도록 불철주야 내조한 강 씨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강 씨는 자신의 공을 전실 자식인 이방원이 가져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둔 강 씨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상식이겠지만 권력다툼에서 밀리면 곧장 죽음이라는 등식을 강 씨가 모를 리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강 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 자리에 올리는데 이게 비극의 잉태하는 씨앗으로 작용하게 된다.

분노한 이방원은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내처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까지를 살해하였다. 아버지 이성계는 이 변란에서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으면서 권력 앞에 인면수심으로 행동하는 자식들의 다툼에 새삼 인생무상을 느꼈다.

이러한 '역사'에서 단연(?) 도드라지는 인물이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다. 이성계와 신의왕후(神懿王后) 안변 한 씨(安邊韓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미래를 혜안(慧眼)할 줄 아는 눈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방우는 부친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처자를 데리고 강원도 철원 보개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국가 일에는 일체 간여하지 않고 해주로 옮겨 가서 살았다.

이후 이성계로부터 동북면 땅을 전사(田舍)로 하사받은 후에도 함흥으로 다시 옮겨 간 후 1년 여 만에 사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소주를 너무 탐하여 술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일찍 졸(卒)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더 많은 기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다만 그가 나름 위대해 보이는 것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일찌감치 버리고 은둔함으로 인해 제명대로 살다 죽었다는 대목이다.

필자의 이 칼럼 중 '11화. 한신이 반란에 성공했더라면'에도 나오지만 역대 치자(治者)들은 하나같이 개국공신마저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게 어떤 정석이자 수순을 모델로 삼았다.

이러한 어떤 '상식'을 이방우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었다. 만약에 이방우가 권력에 욕심을 부렸더라면 역사는 그를 어찌 평가했을까? 또한 이방원은 과연 그러한 그를 온전히 살려두었을까! 소주를 마시면서 그를 떠올려본다.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술잔을 내민다.

"인생이란 건 별 것 아니라네, 어차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아니겠나. 그러니 욕심은 내던지고 이승에 소풍 왔다손 치고 홀가분하게 놀고 마시다 다시 오게나."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10년을 못 간다는 말이다.

요즘은 이마저 '퇴색되어' 권불오년(權不五年)으로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권력을 쥔 자들의 일부는 오만방자(敖慢放恣)의 기색이 때론 안하무인(眼下無人)도 부족할 지경이다. 정부 기관의 모 수장이 재벌과 대기업을 혼내주러 다닌다고 한 말이 이런 지적의 과녁이다.

자신의 신분은 정권의 시한인 5년도 지탱하지 힘들지만, 기업은 최소한 개인의 정년까지 직장과 급여를 보장하고 있음을 왜 간과하는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배울 만치 배웠다는 사람이 하지만 정작 '모든 화의 원인은 구시화문(口是禍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왜 모르는 걸까?

"그때가 좋았어!"라는 세인들의 평가를 받고자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잘 하고 볼 일이다. 국민들의 탄핵열풍에 힘입어 정권이 바뀌었으되 국민의 삶의 질 발전은커녕 오히려 퇴보한다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조소처럼 비난의 손가락질만 쇄도할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홍경석-인물-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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