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엔 안 나가봐서 다른 나라 국민들의 집들이 문화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오늘은 아들의 집들이가 있는 날이다. 아직 미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내 집 마련이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까지를 일궈낸 아들이다.
따라서 필자는 물론이거니와 특히나 아내의 반가움은 진작부터 입이 귀에 가 붙어서 당최 내려오려 하질 않고 있다. 아내와 부부의 연을 맺고 가정이라는 둥지를 튼 곳은 천안시 원성동의 반 지하 월세방(月貰房)이었다. 한겨울이면 방안의 자리끼마저 꽁꽁 얼어 동태가 되기 일쑤였다.
부자와는 사뭇 달리 가난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부정과 부패에 연루된 부자(富者)라고 한다면 이는 분명 부끄러움이다. 정권이 바뀌면 마치 연례행사인 양 전직 고위관리들이, 그것도 부정부패와 관련하여 쇠고랑을 차는 모습을 쉬 볼 수 있다.
그러자면 왜 그들은 과거 조선의 청백리들처럼 청렴결백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까지를 드러내게 만들곤 한다. 물론 개중엔 정치보복이라며 반발하는 이도 없지 않다. 어쨌든 예나 현재 역시도 불변한 건, 뇌물은 독약이자 쥐약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기에 하늘과 쥐만 알았던 짬짜미조차 언젠가는 온 세상에 그 전모까지 드러날 수 있다. 부침이 심했던 왕조 국가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조선이 500년이나 그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자랑스런 과거를 지니고 있다.
그 핵심엔 청백리(淸白吏)가 있었다. 한국의 국가청렴도가 지난해에도 낙제점을 받았다. 100점 만점에 고작 54점이며 세계 180개국 중 51위였다고 하니 대입(大入)으로만 쳐도 단박 낙제(落第)다.
국제투명성기구(TI)의 한국본부인 사단법인 한국투명성기구가 2월 22일 발표한 '2017년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 나타난 성적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청렴 성적표가 낮아서 많이 부끄럽다.
제왕적 대통령의 '재벌 길들이기'와 아울러 계획된 약탈에 다름 아닌 소위 '삥뜯기'의 구습은 급기야 최순실 국정 농단까지 불러왔다. 이로 인해 대통령이 탄핵 당했는가 하면 국가 신인도에도 빨간 불이 켜지는 등 후유증이 심각했다.
설상가상 대통령의 부재(不在)는 가뜩이나 만만하던 한국을 아예 속국(屬國)으로 모는 듯한 중국의 '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보복'으로까지 나타났다. 따라서 청백리를 돌아보는 것에 의의가 남다름은 당연지사다.
조선시대에는 약 200여 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청백리는 관리(官吏)들 중에 청렴결백한 사람을 임금의 재가를 얻어 선정한 청렴한 벼슬아치들로,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해 마련되었던 관기숙정(官紀肅正)의 제도였다.
이에 녹선(錄選)되어 '청백리록'에 오르면 자손들은 그의 음덕으로 출사의 특전이 부여되었는데 이를 일컬어 음서제(蔭敍制)라고 했다. 이러한 것이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고려 성종 때이다. 이는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폐지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이를 벤치마킹(?)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국민적 공분의 타깃(target)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불거진 공공기관의 채용비리는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이 이 같은 주장의 바로미터다.
여하간 조선시대 당시 배출된 청백리의 숫자는 총 44씨족(氏族)에서 217명이 배출되었는데 본관별로 5명 이상을 배출한 집안은 전주 이 씨(全州李氏)와 파평 윤 씨(坡平尹氏), 안동 김 씨(安東金氏)와 연안 이 씨(延安李氏) 외 남양 홍 씨(南陽洪氏)와 진주 강 씨(晉州姜氏) 등으로 알려져 있다.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에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이 더욱 우뚝하다. 맹사성(1359~1438)은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의 상신으로 5부판서와 좌·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으로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판서와 정승의 높은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도 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다닌 우리나라 대표적 청백리로 그 명망까지 소문이 짜한 분이다. 좌의정이 된 맹사성이 고향인 온양에 들른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를 듣고 안성 근처 양성(楊珹) 현감과 이웃의 진위(振威) 현감도 나타났다. 점수를 얻으려고 하인들을 시켜 길을 닦아 놓고 통행을 금지시켰다. 해가 질 무렵 한 노인이 갈댓잎 도롱이를 입고 소를 타고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에 하인이 시비를 걸었다. 노인은 사람이 다니라고 만들어 놓은 길인데 왜 못 가게 하냐고 물었다. 하인은 노인을 소에서 끌어내려 현감 앞에 내동댕이쳤고, 현감은 노인에게 고개를 들어보라고 했다. 고개를 든 노인을 보자 현감들이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그 노인이 바로 맹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도 출타할 때 따라오는 시종들이 번거롭다며 혼자 소를 즐겨 타고 다녔다고 한다. 맹사성이 거처하던 집은 비와 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을 정도로 청렴하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사례를 굳이 현대인들에게 대입(代入)할 필요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렇긴 하더라도 공직자의 청렴은 새삼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왜냐면 그들이 받는 급여와 장차의 연금 또한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때문이다. 새삼 강조하건대 맹사성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조선은 오랫동안 국가의 기틀을 안정적으로 다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현재는 어떠한가? 전국 어디를 가도 아파트의 건설현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미 주택 보급률이 100%를 훌쩍 넘긴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많은 아파트를 지어도 과연 분양이 다 될까를 우려스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비단 필자만의 우문(愚問)일까.
- "[집 안 파는 다주택 장관들… 솔선은커녕 '내로남불' 격] 대통령도 1주택자 됐는데… 다주택 장관들의 '배짱'〉(1월 25일 조선닷컴)을 보니 문재인 정부 1기의 '다주택 장관' 10명 중 9명이 여전히 집을 팔지 않고 버티고 있다고 한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작년 8·2 부동산 대책 발표 후 반년이 다 되도록 김 장관은 물론 장관들 대부분이 꿈쩍도 않으니 대통령의 영(令)을 무시하는 것처럼 비친다. 대통령은 서울 홍은동 주택을 팔았다고 한다.
대통령과 장관이 이렇게 엇박자 행보를 보이면 부동산 정책을 대하는 국민들 마음은 헷갈리고 씁쓸하다. 정책에 대한 지지 역시 약화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지시를 장관들조차 따르지 않으면 누가 솔선수범할 것인가.
서울 강남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은 우리나라가 아무리 자본주의라지만 극히 비정상이다. 국토가 이렇게 좁은 나라에서 부동산 투기는 사실상 범죄라는 인식이 뿌리내려야 한다. 그런데도 장관들의 그런 태도를 보니 또 하나의 '내로남불'을 보는 듯 하다." -
이상은 지난 2월 2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필자의 따끔한 지적이다. 이를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되(그랬다면 더 좋았겠지만) 2주택 이상 다(多)주택 소유자군(群)에 속했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얼마 전 부군 명의로 돼 있던 경기도 연천군 소재 단독주택을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매입자가 김 장관의 친동생이었다고 보도되면서 말이 많았다. 빨리 정리하긴 해야 하는데 위치 상 빨리 집을 팔기가 어려워서 동생이 산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마도 주무장관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부동산 가격 폭등(서울과 세종 등) 현상에 그만 마음까지 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김 장관이 다주택자라는 '굴레'에서 해방됨에 따라 다주택자를 타깃으로 한 현 정부의 '공세'는 더욱 가파를 것으로 전망된다. 부동산 가격이 나온 김에 '불패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서울 강남의 경우를 살펴보자.
1980년대 강남의 단독주택(대지 50평 기준) 가격은 1억 원 초반대였다. 그러던 것이 날개를 달면서 1990년대에는 5~6억 원, 2000년대엔 7~8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작년 2017년 기준으로는 자그마치 17~20억 원에까지 도달했으니 이쯤 되면 달랑 집 한 채만 갖고 있어도 "강남부자"라는 등식과 인식까지의 공유가 가능한 셈이다.
이처럼 부동산 가격의 상승, 아니 폭등이 더욱 문제인 건 부동산이란 요물은 채소처럼 가격이 올랐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우상향 곡선을 그린다는 점이다. 실제로 강남 재건축의 경우 2015년만 해도 가격이 8억 원 초반대였다.
한데 재건축이 가시화되면서 단숨에 11억 원까지 돌파했다. 불과 1년 여 만에 억대의 금액이 춤을 추니 이러한 불로소득에 뉘라서 눈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아들의 집들이 이야기에 괜스런(?) 청백리 얘기가 붙었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필자의 의도적 포석이었음을 밝힌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자본주의 국가이며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요한 자가 '존경'과 부러움까지 받는 현상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공직자라고 한다면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견지해야 마땅한 때문이다.
이야기가 많이 샛길로 빠졌다. 아들이 이사 후 집들이를 하는 오늘은 날도 참 좋다. 3월 3일이니 그야말로 '삼삼데이(33day)'다. '삼삼하다'는 사전으로도 사물이나 사람의 생김새나 됨됨이가 마음이 끌리게 그럴 듯 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금상첨화다.
만약에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인 집들이 문화가 없었더라면 아들의 아파트 또한 구경하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이제 아들에게 남은 건 직장에서의 승진과 더불어 결혼 후에도 변함없는 청렴(淸廉)한 지아비가 되는 것이다. 사족이겠지만 아들과 며느릿감이 마침맞게(!) 조선시대 청백리 집안에 든 '명문집안' 남양 홍 씨와 진주 강 씨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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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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