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 연가-김재석 작가]Episod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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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야드 연가-김재석 작가]Episode.17

남매 왕족

  • 승인 2020-01-10 13:59
  • 한성일 기자한성일 기자
리야드연가 책표지 완성본(7월4일)
에피소드17
Episode.17

남매 왕족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냐? 여긴 사우디라고."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



이스탄불에서 터키 항공을 타고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으로 넘어왔다. 공항에 내릴 때까지 아키코와 나, 우리 둘의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아키코는 직장인이 무슨 돈을 모아서 이렇게 놀러 다니겠냐며 부모 잘 만난 복도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부잣집 셋째 딸이란다. 아들 하나 볼 거라고 자기까지 낳았는데 딸이 태어나서 부모님이 실망했단다.

반전은 여기서 부터다. 아키코 부모님은 재산 물려 줄 아들도 없는데 돈은 모아서 뭐해, 하며 그녀가 어릴 때부터 줄곧 해외가족여행을 다녔단다. 나는 "이유가 중요하니, 결론이 중요한 거지." 하며 세계 어디를 가나 딸자식 천대받는 건 다 마찬가진데 떡 고물이라도 많이 나왔으면 된 거야, 했다. 나는 내 생활비나 보태는 평민의 자식도 아니고, 부모 생활비도 보태야 되는 천민의 자식이다 보니 급 부러웠다.

"아키코, 이번 여행에 니가 밥도 한 끼 더 사고 그래라."

이렇게 둘이 알콩달콩 하며 왔다.

입국심사 전에 30일 비자 발급을 받으러 이집트 중앙은행에 들렸다. 아키코는 한 번 와봐서 잘 안다며 어디나 환전 금액은 똑 같다고 은행에 들린 참에 환전까지 했다. 조금 시간이 지체됐다. 여권에 비자인지를 붙이고 심사관 도장까지 꽝, 찍고 나왔다. 짐을 찾으러 수화물 나오는 곳으로 갔는데 달랑 우리 둘 밖에 없었다. 내 짐은 수화물 코너에서 빙빙 돌고 있는데, 아키코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캐리어는 일본 Time Walker 브랜드로 엔티크한 천연가죽 제품이다. 핑크빛 신상이라 누가 봐도 갖고 싶은 캐리어였다.

우리 둘은 동시에 "thief(도둑)" 했다.

아키코는 항공사 직원을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나는 아키코를 겨우 진정시키고 분실신고서를 작성하고는 공항을 나왔다. 택시를 잡아 카이로까지 얼마에 가기로 흥정을 했다. 그런데 카이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꽉 막혔다. 앞에서 사고가 난 모양이다. 처음에는 택시기사가 영화 25시에 나오는 안소니 퀸처럼 생겨서, 점잖게 보였는데 갑자기 말을 바꿨다. 이제부터는 미터기로 갈아탄다고 했다. 미터기가 올라간 만큼 요금을 내란다. 아키코가 그만 폭발했다. 영어도 아니고 일본말로 뭐시코, 뭐시코 하며 시불코 하는데 일본말에 저런 욕이 있나 싶었다.

택시기사는 흥정한 돈을 다 내고 내리라며 내 손가방을 꼭 잡고 있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지불했다. 그는 택시를 휑, 유턴해서 공항으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 둘은 도로변에 서서 나는 '신발끈, 신발끈' 하고, 아키코는 '빠가야로, 빠가야로' 하며 허공에다 삿대질을 해댔다.

그런데 아키코가 "Wait a minute", 하더니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졌다.

"여권이 없어! 앙~"

그만 아키코가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울음을 터뜨렸다. 택시기사와 실랑이를 하다 여권을 두고 내렸나 보다. 나는 저절로 하늘을 우러러 봤다.

'오 마이 갓, 이 덜렁이'

리야드 알아카리아 쇼핑센터



산부인과 의사인 루루와 약속을 했다. 이번 금요일에 나들이 나갈 때 '알아카리아' 쇼핑센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영어로 말하기가 훨씬 수월해진 것도 약속 부담이 덜 됐다. 수경 간호사의 말처럼 시간이 해결해 준 면도 없지 않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내가 답답해서 억척스럽게(?) 공부한 점도 조금 있다.

병원 고참 언니들은 기숙사 방 안에 대부분 브라운관 텔레비전과 VHS 비디오테이프 녹음기를 갖추고 산다. 여기 사우디에는 밖에서 즐길만한 오락거리가 별로 없다. 영화관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신기할 수 있지만, 여기는 여기 방식대로 사니 별 수 없이 맞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바깥 나들이 나갈 때,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언니들 방에서 본다. 한국에서도 '건어물녀' 였던 나였기에 오히려 방콕하며, 영화비디오 보는 게 편했다. 자연스럽게 건어물녀끼리 모여 영화 마니아 팀이 생겼다.

영화는 미국 액션 영화나 러브스토리 영화를 보는데 영어자막과 아랍어 자막이 화면 밑에 뜬다. 어떤 영화는 120분 내내 모자이크 된 부분만 있다. 사우디에서는 '와하비즘(Wahhabism)'이라고 모태 이슬람, 복고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경건주의가 은근히 판친다. 처음 이슬람이 얼마나 경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한 장면도 안 돼, 피범벅도 안 돼, 무슨 19금 영화 보는 것도 아닌데, 조금 흥분하려 치면 모자이크다. 그래서 나도 화면보다는 영어대사를 주로 들었다.

어느 날 버터 발린 영어 대사가 귀에 들어왔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누워 뒹굴뒹굴 하며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영어가 들려도 되나, 싶었다. 대사가 빨라서 못 알아들었던 배우들의 말이 들렸다. 마치 배우의 행동에 딱 맞춰서 들렸다.

영어가 들리자 말하기도 수월했다. 머릿속에서 짜깁기하지 않아도 주어와 결론부터 말하고 대충 그만한 이유를 대나갔다. 로라 아줌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수다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루루가 쇼핑센터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OK, 했다. 로라 아줌마는 굽실굽실하기 바빴던 그녀에게….

'알아카리아' 쇼핑센터는 1989년 한국으로 치면 서울의 미도파 백화점, 화신 백화점, 부산의 미화당 백화점, 대구의 대구백화점 등등 다 합쳐 놓은 크기다. 한국은 금싸라기 땅에 백화점을 짓다 보니 층수는 높다. '알아카리아' 쇼핑센터는 단층인 대신 엄청 길고 넓다.

부산 남포동 극장가에 위치한 미화당 백화점은 엄마가 자주 애용했다. 엄마는 한 번씩 스트레스를 백화점에서 푼다. 가볍게 버스를 타고 가서는 양 손에 무겁게 들고 택시를 타고 온다. 내 옷을 사준다며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

엄마는 부인복 코너만 돌면서 "이 옷 어때, 저 옷 어때?" 했다. 내가 부인복이 왜 필요해, 할 틈도 없이 자기 옷을 산다. 나도 따라온 김에 오기가 나서 위아래로 추리닝 한 벌 맞췄다. 아무튼 그렇게 둘러 본 백화점도 넓다고 생각했는데….

알아카리아 쇼핑센터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여기서 아바야를 입고 허벌나게 뛰는 사람은 한국여자 밖에 없다."

통근 버스가 쇼핑센터 입구 정류소에 닿자, 루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입은 단출한 검은색 아바야는 비교도 안 되는, 금색 문양이 옷깃을 따라 새겨진 고급 실크의 아바야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엔티크한 아라비안 문양의 가죽 가방까지….

같이 걸어가는데 내가 꼭 '서번트(하인)'처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쇼핑 전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쇼핑 짐까지 들고 있었으면 영락없는 소공녀와 무수리 궁녀다.

우리 둘은 뭐시기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유명한 아라비안 풍의 고급 레스토랑인데 아쉽게도 식당 간판을 읽을 수 없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꼬부랑 아랍어 붓글씨 체다.

레스토랑 안에는 여성 전용 좌석이 따로 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아바야를 입은 여성 뿐이다. 그녀들은 아랍어로 살라살라 했다. 루루가 미리 주문했는지 아랍전통 과자가 소쿠리에 담겨 나왔다. 말린 과일과 과자가 종류별로 담겨있다.

"무슨 과자를 좋아할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가져오라고 했어요. 외국인들이 다들 여기 과자를 좋아해서…. '바끌라바'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나는 입맛을 다셨다. 기숙사 식당에도 디저트로 사우디과자가 나오지만 마트에서 사온 과자이고, 이렇게 요리되어 나온 과자를 먹기는 처음이었다. 갓 구운 과자 냄새가 솔솔 피어 오르는데 그 향기가 달랐다. 바끌라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시럽이 아몬드를 촉촉하게 감싸고 있다. 부스슥, 입 안에서 부드럽고 달달한 파이가 부셔졌다. 딱딱한 아몬드가 뿌드득, 이빨에 씹혔다.

'모래성일까? 모래 땅 위에 세워진 견고한 성….'

사우디에 도착한 첫날밤, 전용버스를 타고 오며 리야드 시내 밤 풍경을 멀리서 봤었다.

에메랄드처럼 빛났던, 모래 위에 세워진 젖과 꿀이 흐르는 왕궁을….

"샌드 캐슬(Sand castle) 맛이네요."

"What? Sand castle! 무슨 맛이죠?"

루루는 어처구니없는 맛인가 하며 나를 바라봤다.

"파이는 모래처럼 스르륵 입 안에서 허물어지며 녹아버렸어요. 파이 위에 올려 진 아몬드는 조금 딱딱했고, 시럽과 뒤섞여 달았어요. 마치 견고한 성처럼."

루루는 내 표현에 구미가 당긴 모양이다. 그녀도 바끌라바를 한 입 깨물었다.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지만, 모래땅이라 쉽게 무너져 버려요."

루루는 갈수록 내 말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아니면 미스 수진이 어느새 이렇게 영어가 늘었지 하며 신기해 하든가.

"여기가 마치 모래성 같아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같은 게…."

"루루같이 응어리 진 젊은 여성들이 여기 가득 차잖아요."

루루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이런 이야기는 영어로 한다고 해도 조심하는 게 좋아요. 누가 우리 이야기를 듣고 종교경찰에게 이를지 몰라요."

루루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전에도 종교경찰이 내 뒤를 뒤따라왔어요. 비밀 연애하는 지 감시하려고요. 단지 물건 사러 나왔을 뿐인데."

나는 카펫시장에서 부딪친 종교경찰 때문에 잠시 기분이 우울해졌다.

"우리 분위기를 바꿔요. 혹시 미스 수진을 은근히 엿보는 사람 없어요. 종교경찰처럼 감시하는 사람 말고. 흐흣."

"누가 나를 엿보지. 징그러워. 나 요즘 빨간 팬티 입고 다니는데 부끄러워요."

루루는 한참 어이없어 하며 웃더니, 19금 분위기로 금세 바뀌었네, 했다.

"오늘 후견인을 한 명 소개할 게요. 쇼핑 나올 때 같이 따라오는 오빠가 있어요. 보,디,가,드."

그녀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왔다. 우리 뒤에 남자가 한 명 붙었다.

'어머! 마호멧…. 아람코의 젊은 간부 사원.'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손을 입술에 모으고 얼음이 되었다.

"쇼핑할 때 내 보디가드. 친오빠에요. 아마 인사 했죠."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루루는 내 귀에 입술을 대며 소곤거렸다.

"이 오빠가 은근히 누굴 엿보길 잘해요."

루루와 나는 앞에서 걷고 마호멧은 뒤에서 따라왔다. 나는 루루의 손을 잡고 겨우 걸었다. 뒤를 슬쩍슬쩍 돌아봤다.

'어떻게 해. 오늘 쇼핑 계획은 물 건너갔다. 이런 보디가드를 데리고 무슨 물건이 눈에 들어 오겠어.'

루루와 마호멧은 친남매였다. 그것도 왕족 가족이다. 서열이 낮을 지는 몰라도….

루루는 오빠와 병원 이야기를 하다 '미스 수진' 이야기를 꺼냈는데 '좀 유별난 한국여성'이라고 소개했단다. 그는 아람코 신입직원 정기검진도 있고 해서 한 번 얼굴이나 보러 갈까 했다고 한다.

그럼,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로라 아줌마는 왜 이런 이야기를 안 해줬지, 하며 두 사람에게 반문했다.

"로라 아줌마는 이집트에서 자기 친척을 데려오고 싶어서 애걸복걸하는 거죠. 우리가 후견인이 되면 쉽게 데려올 수 있고, 직장도 구하기 쉬우니까. 자기 생각 뿐이에요."

로라 아줌마가 루루에게 붙어서 사바사바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다음에 미스 수진을 집으로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마호멧의 말에 나보다 루루가 먼저 반응했다. 그를 얄미운 듯 쳐다봤다.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냐? 여긴 사우디라고."

어느새 쇼핑센터 입구까지 왔다. 기숙사 통근 버스가 올 시간이 되었다. 그 전에 검은색 캐딜락이 미끄러지듯 입구에 섰다. 차체가 미끈하게 잘 빠졌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렸는데, 중년의 검은색 양복 차림을 한 아랍인 기사였다. 루루와 나는 양 볼을 맞추며 인사했다. 마호멧과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마호멧이 뒷좌석 문을 열고 루루를 태웠다. 보통 운전기사가 뒷좌석 문도 열어주고 하던데, 이 운전기사는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마호멧이 그에게 땡 큐, 했다. 마호멧은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두 사람을 태운 캐딜락은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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