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Y-zone 프로젝트: 3대 하천 재발견] 문화가 깃든 유등천에서 잠시 쉬어가다

[대전 Y-zone 프로젝트: 3대 하천 재발견] 문화가 깃든 유등천에서 잠시 쉬어가다

유등천③ [아름다운 천변 경치에 문화감상까지 일석이조]

  • 승인 2021-09-14 07:00
  • 신문게재 2021-09-14 10면
  • 신가람 기자신가람 기자

컷-3대하천





유등천 전시장, 민간관리로는 한계…폭우 때 작품 400점 유실되기도

위치, 규모 완벽한 축구장은 비둘기만 머무는 곳으로 전락

 

KakaoTalk_20210912_160902684_02
유등천변(태평교 부근)의 하늘과 땅의 색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가람 기자 shin9692@
#자연은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다
여름 끝자락에서 다시 찾은 유등천은 변함없이 초록빛과 천 내음을 머금은 채 반겨주었다.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해보니 어느새 매미 소리가 그쳤다. 그렇게 밤낮 잠을 깨우는 소란스런 말썽꾸러기지만, 겨울이 되면 또 생각날 것이다. 이번에는 중구 태평교를 시작으로 유등천을 타고 갑천 방향으로 올라오는 코스를 따랐고, 그동안 중촌동, 태평동, 유천동 방향의 천변을 걸었다면 이번에는 서구 가장동, 용문동 방향의 천변을 걸어봤다. 그동안 수도 없이 찾았던 유등천이지만, 이날 찾은 유등천(태평교 부근)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다. 적당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만으로 그간 쌓인 회포를 풀기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아직 낮에는 햇살이 뜨거워 조금 걸었는데도 등에는 땀 줄기가 흘렀다. 그동안 쌓인 지방들도 겸사겸사 빠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에 걸음 속도를 조금씩 높여갔다. 자연이 싱그러운 탓인지, 천변 곳곳에는 온갖 벌레들이 모여있어 산책하더라도 선글라스는 필수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눈에 벌레가 들어가 곤욕을 치르곤 했는데, 매번 손으로 "저리 가라"고 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KakaoTalk_20210912_160902684_06
가끔은 물이 흐르는 소리에도 마음 속이 정화되기도 한다. 유등천 가장교 부근  신가람 기자 shin9692@
이번 유등천 걷기 프로젝트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사진 잘 찍기'였다. 잊을 만하면 회사에서나 아내에게 "기자가 사진을 왜 이렇게 못 찍어?"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그때마다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뭐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니 답답할 따름이다. 어쩌면 나란 존재는 사진을 잘못 찍으니 아름다움이 뭔지도 모르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홀연히 씁쓸해진다. 그렇게 작정하고, 작품 열정을 위해 숲을 파헤치면서까지 '천의 흐름'을 찍었다. 물길이 마주 닿는 소리와 하강하는 물의 모습을 보다가 또 주특기인 멍을 때리고 말았다.

KakaoTalk_20210912_160902684_04
태평교부터 수침교까지 이어지는 하상도로 한 켠에는 시민들 만의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사진은 가장교 부근  신가람 기자 shin9692@

#서예 작품, 그림, 명언 글귀까지… 유등천은 자연 미술관
사실 이번 유등천 걷기의 주요 테마는 '곳곳에 숨어있는 문화공간 알리기'였다. 태평교에서 가장교까지 서성거리듯 걷다 하상도로 한쪽에는 시민들이 제작하고 관리하는 전시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태평교부터 시작해 수침교까지 1.8㎞가량 이어지는데 알고 보니 전시장 길이로는 세계 최장을 자랑하고, 전시된 작품만 3000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가장교에서부터 걸음 속도를 늦춰 작품 하나하나씩 보거나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거리에 있는 작품들이 마음속 큰 위안이 되리라 생각지 못했다. 순간마다 깊이 새겨지는 특별한 글귀들은 하나둘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대부분 들어보거나 알고 있던 글귀였지만, 어느새 이런 작은 위로도 잊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복잡하게 살지 말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아픔 없는 사람 없다. 힘들거든 쉬어서 가자' 등 수많은 글귀가 작은 속삭임들로 다가왔다. 

 

KakaoTalk_20210912_191302942
태평교부터 수침교까지 이어지는 하상도로 한 켠에는 시민들 만의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사진은 가장교 부근 신가람 기자 shin9692@
정확히 5년 전이다. 대학 시절 기회가 닿아 동국대에서 6개월 간 승려들과 같이 수업을 들으며 불교 철학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출가(出家, 승려가 되는 것)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 출가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마음이 항상 불안정했고, 매번 생각에 깊이 빠지는 편이라 그럴 때마다 불교로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출가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한 스님은 조언해주기도 했다.



"출가를 하겠다고 부모를 설득할 때 감정의 동요 생기지 않으면 그날로 아사리 의식(삭발)을 하면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비록 그 관문을 넘지 못했지만, 유등천의 글귀를 보면서 위로를 받은 탓인지 어느새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고 말았다. 문화의 존재 요소는 그런 것이다. 닿는 이로 하여금 사색의 기회를 주는 것.

KakaoTalk_20210912_160902684_07
태평교부터 수침교까지 이어지는 하상도로 한 켠에는 시민들 만의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사진은 가장교 부근 신가람 기자 shin9692@
글귀 하나하나 읽다 보니 절반도 돌지 못했는데 이미 한 시간 반이 흘렀다. 그러면서 문득 든 생각은 "이 정도의 규모와 공간을 이렇게 활용하는 게 최선일까?"

유등천 전시장을 살리기 위한 민간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시민들의 후원을 통해 관리하지만, 결국 지자체의 참여 없이는 기존의 상태로밖에 머물 수 없다는 게 개인적인 판단이다. 특히 민간 관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 보니 2020년 극심한 폭우 때는 하천이 잠겨 400여 점의 시민 예술품이 유실되는 안타까운 일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미 시민이 직접 품고 있는 '유등천 전시장'이 충분한 규모와 공간까지 마련했으니 지자체의 관심을 통해 새로운 문화사업으로 재탄생하는 건 어떨지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KakaoTalk_20210912_160902684_11
주말을 맞아 시민들이 유등천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있다. 신가람 기자 shin9692@
KakaoTalk_20210912_160902684_10
깔끔하게 관리된 게이트볼 장(수침교)에서 어르신들이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 신가람 기자 shin9692@
#체육시설, 시민에게 돌려주세요
유등천 전시장을 천천히 전부 둘러보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버렸다. 수침교 끝까지 둘러보고 나서야 다리가 아프다는 걸 인지했고,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멀리 수침교 건너편에는 어르신들이 게이트볼장에서 볼을 치며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는 야외 스포츠가 제격이긴 하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탓에 5분도 채 쉬지 않고 게이트볼장 근처로 가 구경을 시작했다. 수침교 바로 밑에 있는 게이트볼장은 잔디 정리까지 됐는지 깔끔히 정돈됐고 어르신들도 보란 듯이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다. 그런 와중에 축구인의 입장인지 직업적 소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교 근처에서 본 축구장을 대비하게 됐다. 양쪽에 골대가 설치돼있어 누가 봐도 축구장인지 알 수 있고, 규모를 보더라도 정식 축구장 크기와 비슷해 보였다.

문제는 위치와 규모 등이 완벽한 축구장임에도 불구하고 잔디 관리를 포함해 운영 시스템이 전혀 없으니 비둘기만 머무는 곳으로 전락해버렸다. 수익률 배분을 시나 시 체육회와 협의하고 기본적인 관리권을 지역축구협회나 민간에게 넘긴다면 주마다 청년들로 가득 찬 전문 축구장으로 재탄생해있을 텐데 이런 걸 보면 매번 속이 탈 수밖에 없다.

KakaoTalk_20210912_160902684_01
게이트볼장과는 반대로 가장교 바로 밑의 축구장은 관리가 되지 않아 곳곳에 비둘기만 가득차 있다. 신가람 기자 shin9692@

그동안 유등천의 낯익은 모습들을 담았다면 이날엔 유등천의 새로운 모습까지 속속 들여다봤다. 문화로 답을 찾기도 했지만, 워낙 심취할 수 있는 곳들이라 "더 알려질 수 있는 곳일 텐데…"하며 곳곳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긴 하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성찰의 계기가 된 건 자신이었다. 문득 과거에 젖고 말았지만, 가끔 이런 시간 여행은 내일을 다시 열심히 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삶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란 힘을 주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유등천=신가람 기자 shin9692@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아산시 '곡교천 탕정지구 연계사업' 밑그림 그려졌다"
  2. 주말 사우나에 쓰러진 60대 시민 심폐소생술 대전경찰관 '화제'
  3. "방문 환경 개선" 양산 천성산 미타암, 새 공양간 건립공사 준공
  4. 대전 교사들 한국원자력연 방문, 원자력 이해 UP
  5. 낮고 낡아 위험했던 대전버드내초 울타리 교체 완료 "선제 대응"
  1. 대전우리병원, 척추내시경술 국제 교육 스파인워커아카데미 업무협약
  2.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 심장­호흡재활센터 개소
  3. 유등교 중고 복공판 사용 형사고발로 이어져…안전성 이슈 재점화
  4. [라이즈 현안 점검] 대학 졸업자 지역 취업 증가 목표…실현 가능할까?
  5. 충남대병원 안순기 예방관리센터장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헤드라인 뉴스


[기획] 철도가 바꾸는 생활지도… 2030년대 충청 `30분 생활권`

[기획] 철도가 바꾸는 생활지도… 2030년대 충청 '30분 생활권'

충청권 광역철도 1단계, 대전~옥천 연장, CTX(광역급행철도)가 2030년대 중반까지 순차적으로 개통될 경우, 대전·세종·충북을 오가는 시민들의 생활권은 지금과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가장 큰 변화는 이동시간 단축이다. 현재 대전 도심에서 세종 정부청사까지는 교통 상황에 따라 40~50분이 걸리지만, CTX와 광역철도가 연결되면 통근 시간은 20~30분대로 줄어든다. 세종 근무자의 대전 거주, 혹은 대전 근무자의 세종 거주가 현실적인 선택지가 된다. 특히 출퇴근 시간대 교통체증에 따른 불확실성이 줄어들면서, 젊은 직장인과 공무원의..

[기획]2028년 교통 혁신 도시철도2호선 트램 완성으로
[기획]2028년 교통 혁신 도시철도2호선 트램 완성으로

2028년이면 대전은 도시철도 2호선 트램 완공과 함께 교통 혁신을 통해 세계적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 도시로 성장할 전망이다. 11일 대전시에 따르면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사업은 지난해 12월 착공식을 개최하고, 현재 본선 전구간(14개 공구)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2027년까지 주요 구조물(지하차도, 교량 등) 및 도상콘크리트 시공을 완료하고, 2028년 상반기 중 궤도 부설 및 시스템(전기·신호·통신) 공사를 하고, 하반기에 철도종합시험 운행을 통해 개통한다는 계획이다. 최근에는 내년 대전시 정부 예산안에 공사비로 1..

美 연준,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하…원·달러 환율 향방은?
美 연준,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하…원·달러 환율 향방은?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가 10일(현지시간) 고용 둔화 등을 고려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이로 인해 한미 간 금리 차이가 줄어들면서, 최근 1500원대를 위협했던 원·달러 환율에 숨통이 트일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연준은 이날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뒤 기준금리를 기존 3.75∼4.00%에서 3.50∼3.75%로 내렸다. 이는 올해 9월과 10월에 이은 3번 연속 금리 인하다. 연준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2.50%)과 미국 사이의 금리차는 상단 기준 1.25%포인트로 좁혀졌다. 파월 의장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 ‘자전거 안장 젖지 않게’ ‘자전거 안장 젖지 않게’

  • ‘병오년(丙午年) 달력이랍니다’ ‘병오년(丙午年) 달력이랍니다’

  • 풍성한 연말 공연 풍성한 연말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