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안개와 헤어질 결심, 함명규의 노래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안개와 헤어질 결심, 함명규의 노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23-02-06 08:45
  • 수정 2023-02-06 17:37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이승선 교수
이승선 교수
1964년 스물세 살의 소설가 김승옥은 '무진기행'을 발표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삥 둘러싸고 있는 곳"이 무진이었다. 무진의 안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고, 사람을 둘러싸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은 것이 무진의 안개였기 때문이다. 1967년 김수용 감독은 영화 <안개>를 제작했다. '무진기행'이 원작이었다. 김승옥이 각색하고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이 감수했다. 신성일과 윤정희가 주연으로 나왔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 다오. 안갯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작곡가 이봉조가 영화 주제곡 '안개'를 만들었다. 열여섯 살 정훈희는 주제가를 부르며 가수로 데뷔했다. '안개'는 방송을 통해 삽시간에 전국에 퍼졌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정으로 노래를 듣고 불렀다. 그해 가을, 육군 대위 함명규도 대구 육군병원에서 '안개'를 듣고 또 들었다. 중한 부상자였던 함명규에게 '안개'는 애창곡이 되지 못하고 애청곡일 뿐이었다. 눈을 뜨고 눈물을 감추며 걸어가야 할 그의 앞길이 안갯속 같았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많이 울었다.

함명규는 법관이 되고 싶었다. 충남대 법대에 입학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에게 돌봐야 할 동생들이 아주 많았다. 2학년을 마치고 갑종 장교로 임관했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성실하고 명민했다. 사람들은 그가 장군이 될 재목이라 입을 모았다. 결혼 직후 맹호부대 중대장으로 월남에 파병됐다. 1967년 9월 함명규의 집으로 전사 통지서가 왔다. 오보였다. 수류탄 파편이 복부를 관통했으나 함명규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강인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쏟아진 장기를 스스로 거둔 뒤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 병원으로 후송됐다. 대구 육군병원을 거쳐 대위로 예편했다.

법관의 꿈과 장군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접혔으나 함명규에게는 곱고 강한 아내 유행강이 있었다. 아내는 '마침내' 안개처럼 '붕괴'됐었을지 모를 그의 삶을 걷어 준 '단일한' 햇볕이자 바람이었다. 함명규는 성실하고 끈기 있게 일했다. 경제적인 수확은 적었다. 생계를 위해 아내가 생활 전선에 나섰다. 분식집을 열고 치킨 가게도 꾸렸다. 월세를 전전했으나 아이들이 잘 자라줬다. 아들은 운동과 공부를 잘했다. 음악에도 재능이 넘쳤다. 전국 소년체전에서 달리기로 은메달을 받았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아들은 법관이 됐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을 연임한 함석천 판사다. 함 판사는 법관 밴드 '다락'에서 기타를 잡았다. 연구하는 법관으로도 정평이 난 함 판사는 학술단체의 저명한 학술상을 수상했다.



함명규는 쉰네 살의 너무 아까운 나이에 영면에 들었다. 국가를 위해 파병된 시절 입은 부상의 후유증이 깊었다.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함명규의 묘비 바로 곁에 의사상자와 순직한 소방공무원, 독도의용수비대 묘역이 있다. 제자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바친 단원고 선생님 열 분의 묘비도 거기 서 있다. 세월호 참사 때 삼백 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억울하게 사라졌다. 우리는 백일 전 백오십 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10·29 참사로 또 잃었다.

1967년 열여섯의 정훈희가 영화 <안개>의 주제가 '안개'를 부를 때 우리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50달러가 되지 못했다. 2022년 일흔한 살의 정훈희는 <헤어질 결심>에서 '안개'를 다시 불렀다. 55년 만에 국민총소득은 3만 5천여 달러로 늘었다. 230배가 넘는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밤새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재난이라는 안개는 여전히 우리를 삥 둘러싸고 있다.

분별없는 정치권과 곳곳의 이기적 파당들이 앙칼지게 빚어낸 이념적 공격들도 '마침내' 짙은 사회적 재난이 됐다. 무진의 안개는 해가 돋고 바람이 불어야 걷힌다. 언론은 햇빛 아래 진실을 드러내고 바람으로 거짓 주장을 몰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최소한 언론이 이념 갈등의 전장이 되거나 사회적 재난의 발원지가 되면 안 된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4658만$ 수출계약 맺고 거점 확장"… 김태흠 지사, 중국·베트남 출장 마무리
  2. 공회전 상태인 충남교육청 주차타워, 무산 가능성↑ "재정 한계로 2026년 본 예산에도 편성 안 해"
  3. [중도일보 창간74년]어제 사과 심은 곳에 오늘은 체리 자라고…70년 후 겨울은 열흘뿐
  4. [창간74-축사] 김지철 충남교육감 "든든한 동반자로 올바른 방향 제시해 주길"
  5. [창간74-축사] 김태흠 충남도지사 "중도일보, 충청의 역사이자 자존심"
  1. [창간74-축사] 홍성현 충남도의장 "도민 삶의 질 향상 위해 협력자로"
  2. [중도일보 창간74년]오존층 파괴 프레온 줄었다…300년 지구 떠도는 CO₂ 차례다
  3. [한성일이 만난 사람 기획특집-제99차 지역정책포럼]
  4. [창간74-AI시대] 대전 유통업계, AI 기술 연계한 거점 활용으로 변화 필요
  5. [창간74-AI시대] AI, 미래 스포츠 환경의 판도를 재편하다

헤드라인 뉴스


대전어린이재활병원 국비확보 또 ‘쓴잔’

대전어린이재활병원 국비확보 또 ‘쓴잔’

대전시가 2026년 정부 예산안에서 역대 최대인 4조 7309억 원을 확보했지만, 일부 현안 사업에 대해선 국비를 따내지 못해 사업 정상 추진에 빨간불이 켜졌다. 공공어린이재활병원 운영비와 웹툰 IP 클러스터, 신교통수단 등 지역민 삶의 질 향상과 미래성장 동력 확충과 직결된 것으로 국회 심사과정에서 예산 확보를 위한 총력전이 시급하다. 1일 대전시에 따르면 2026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제외된 대전시 사업은 총 9개다. 앞서 시는 공공어린이 재활병원 운영지원 사업비(29억 6000만 원)와 웹툰 IP 첨단클러스터 구축사업 15억 원..

김태흠 충남도지사 "환경부 장관, 자격 있는지 의문"
김태흠 충남도지사 "환경부 장관, 자격 있는지 의문"

김태흠 충남지사가 지천댐 건설 재검토 지시를 내린 김성환 환경부 장관을 향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지천댐 건설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는 김돈곤 청양군수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선출직 공무원"이라고 맹비난했다. 김 지사는 1일 도청에서 열린 2026 주요정책 추진계획 보고회에서 김 장관에 대해 "21대 국회에서 화력발전 폐지 지역에 대한 특별법을 추진할 때 그의 반대로 법률안이 통과되지 못했다"라며 "화력발전을 폐지하고 대체 발전을 추진하려는 노력을 반대하는 사람이 지금 환경부 장관에 앉아 있다. 자격이..

세종시 `국가상징구역+중앙녹지공간` 2026년 찾아올 변화는
세종시 '국가상징구역+중앙녹지공간' 2026년 찾아올 변화는

세종특별자치시가 2030년 완성기까지 '국가상징구역'과 '중앙녹지공간'을 중심으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 전망이다. 1일 세종시 및 행복청의 2026년 국비 반영안을 보면, 국가상징구역은 국회 세종의사당 956억 원, 대통령 세종 집무실 240억 원으로 본격 조성 단계에 진입한다. 행정수도 추진이란 대통령 공약에 따라 완전 이전을 고려한 확장 반영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내년 국비가 집행되면, 국회는 2153억 원, 대통령실은 298억 원까지 집행 규모를 키우게 된다. 국가상징구역은 2029년 대통령실, 2033년 국회 세종의사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갑작스런 장대비에 시민들 분주 갑작스런 장대비에 시민들 분주

  • 추석 열차표 예매 2주 연기 추석 열차표 예매 2주 연기

  • 마지막 물놀이 마지막 물놀이

  • ‘깨끗한 거리를 만듭시다’ ‘깨끗한 거리를 만듭시다’